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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Feb 22. 2023

일 년 반 백수의 소감(小感)-9

- 드디어 시간에 어슬렁거리는 방법을 터득했지만...

- 소감을 所感이라 하지 않고, 小感이라 한 것은 느낀 바 라기보다 아주 소소한 생각 쪼가리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지인이나 친척들을 만나면, ’이제 놀지 말고 뭐라도 해야지‘ 하는 이야기를 더러 듣고 있다. 이럴 때마다 곤혹스럽다. 아! 젊은 사람들이 ’언제 취직할 거냐, 언제 결혼하냐, 아이는 언제 가지냐‘는 소리를 죽기보다 듣기 싫어한다는 것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생계를 위해 긴 시간을 몸 바쳐 일하였으니 재취업의 의무(?)도 없을 텐데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억울하다는 생각도 든다.

     

직업의 사전의 뜻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 기간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이라고 되어 있으니, 사람들은 직업이 없는 상태와 놀고 있는 상태를 완전히 동일시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니까 돈을 벌어야 하는 것도 맞는다. 그러나 직업을 ’직(職)‘과 ’업(業)‘으로, 한 글자씩 따져보면 좀 달리 해석이 할 수도 있다.     


’직(職)‘이란 조직에서의 위치나 맡은 바를 말함이니 당연히 어떤 조직에 속해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업(業)‘은 좀 다르다. 업이란 하는 일이나, 이루어 나가는 일을 말하는 것이니 꼭 조직에 속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다.     


이년이 지나가는 백수의 시간도 세월이 약이 되었을까. 나름 해야 할 것들이 하루의 루틴이 되어 정신과 신체에 서서히 자리가 잡혀가는 느낌이다. 가끔 지인들을 만나면 ’노는데 완전히 특화되었다‘고 웃어넘길 정도가 되었지만, 드디어 해야 할 일이 일상에 자리를 잡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일상에 먼저 자리 잡은 것은 책 읽기이다. 혹자는 ’후회는 죄악임으로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부모님에 대한 불효와 젊은 시절에 독서를 등한시한 시간이 갈수록 왜 그렇게 세월을 보냈는지의 후회로 밀려든다. 세상에 이렇게나 읽어야 할 책들이 많다니, 기뻐해야 할 일인데 생각하면 암담하다. 이 많은 책을 남은 생에 얼마나 읽을 수 있을까. 일 년에 백 권도 벅찬데 그렇게 하더라고 고작 이천권이 최대로 읽을 수 있는 양이될까 생각하면 암담하다. 이문열 선생은 몇 년에 천 권의 책을 읽고 소설가가 되었다는데 나는 평생 천 권이나 읽을 수 있을까.

     

책 읽는 것도 숙련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회사 시절에는 책을 읽다 보면 눈은 책에 있으나, 나도 모르게 머릿속은 회사 일이 헤집고 있어, 책을 읽어도 무얼 읽었는지 멍하여 다시 이전 페이지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다 책을 놓아버리곤 했다. 은퇴 후에도 처음에는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고 속도도 붙지 않다가 이제는 속도가 좀 붙는 듯하다.      


책 속에서 언급된 책이 있으면 찾아보고 이렇게 다음 읽을 책이 이어지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 읽기라고 할까. 또 신문이나 유명인사가 언급한 책 등, 읽고 싶은 책이 쌓이니 도서관에 가면, 마치 욕심 많은 아이가 장난감 가게에서 이것저것 양손에 들다가 모두 떨어뜨려 버리는 아이 같다. 이것저것 들었다가 결국에는 몇 권을 취하고 다음에 읽을 책으로 메모해 두지만 읽을 책 목록은 갈수록 쌓여만 간다. 이리하여 독서는 지금 나의 업의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작년에 간신히 백 권을 읽을 것 같은데, 이렇게 계속 읽으면 뭔가 달라진 나를 보게 되지 않을까 한다.

     

또 하나는 글을 계속 쓰는 것이다. 일 년쯤 글을 써 온 지금에도 둔필(鈍筆)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지만 그래도 계속 써보려 한다. 같이 공부하시는 분 중에 세 권의 소설과 수필집을 출간한 분이 있다. 그분 말에 따르면 열심히 쓰면 어느 정도 향상되지만, 천부적 재능이 없으면 더는 올라가기가 어렵다고 하던데 딱 맞는 말인 것 같다. 앞서 이야기한 청장년기의 독서 휴지기의 후유증이 글짓기 수준에서 벗어나는 것은 난망하지만 그래도 쓰기를 멈추지는 않을 것 같은 나의 마음만은 기특하다. 


이리하여 마침내 백수 이 년 만에 시간에 어슬렁거리는 방법을 터득하고 業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은퇴 시부터 마음에 둔 일들이니 즐거운 업이다. 그런데 세인들이 뭔가를 해야지 할 때의 뭔가는, ’業’이 아니고 ’職’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무리 나는 業이 있고, 그것은 ‘읽고 쓰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들 애처롭게 보는 눈길이 의식된다. 휴~. 이런 차에 마침 어떤 손짓도 있으니 職도 다시 가져야 하나, 깊이 고심하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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