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세상사에 무덤덤하지 못한 성정을 때때로 깊이 되돌아보곤 한다. 나이가 들면 매사를 지나쳐보고 세상사에 관심을 줄이며 둔감하게 사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아직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오십 줄에 들어설 때쯤, 스마트폰과 SNS가 활성화되는 때를 맞아 지인들이 수시로 보내오는 글이 있었다. 처음에는 좋은 글이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늘 비슷한, 좀 처연하다 싶은 내용에 언젠가부터 싫증이 났다. 대부분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하게 살라거나 돈이고 명예도 다 부질없다는 등, 세상을 달관한 듯한 말의 잔치였다. 나이가 들어가면 안달복달하는 맘보다는 너그럽고 여유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맞다. 베푸는 것도 지당한 말이긴 하나, 그 글을 쓴 사람이나 퍼 나르는 사람이나 그렇게 사는지는 의문이다.
은퇴 이후 시간이 많아서인지, 오히려 세상사에 관심이 커지고 거슬리는 것이 눈에 더 자주 들어온다. 언젠가 어느 유적지를 갔더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치우천황을 중국 사람인 듯이 써놓았길래 구청에 민원을 올린 적이 있었다. 민원이라는 제도가 국민의 의견을 듣고 소통을 원활히 한다는 좋은 취지이긴 하나, 왠지 그것으로 담당 공무원이 곤란해지지 않을까 싶어 꺼렸는데 그때는 난생처음으로 의견을 올리고야 말았다. 다행히(?) 다음에 수정하겠다는 답장을 받았다. 또 한 번은 가까이 있는 왕릉에 갔더니, ‘맨발 걷기를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맞춤법이 틀린 글귀가 있어 민원을 보내 수정케 한 적도 있다. 결국 딸에게서 “아빠! 은퇴하고 동네 진상되는 것 아냐?”라는 핀잔을 듣고 말았지만.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도 세상사나 정치의 부조리에 불덩이가 가슴에서 치오르는 것을 보면 나만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친한 친구 간에도 금기시되어 가는 정치 이야기로 울분을 토하면, 뭘 신경을 쓰냐며 무시하고 편하게 살라고 한다. 그 소리에 또 화가 난다. 김형석 교수는 노년을 건강하게 살려면, 사회적 관심을 끊으면 안 된다는데, 이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마음을 여유롭게 하고, 주변을 살피라는 말을 오해하여 세상사에 무관심하게 저 혼자 즐겁게 살자는 친구의 말에는 귀싸대기라도 날리고 싶을 때도 있다.
회사 시절에는 오십 살이 넘은 사원에게 새 일을 맡기려 하면, 이 나이에 뭔 새로운 일을 하겠냐며 싫어하는 직원도 있었다. 예순이 가까워져도 일의 열정이 식지 않던 내 기준으로는 답답하고 분노가 치밀었다. 오십이라야 삼십 년 이상의 회사생활에서 고작 2/3를 지나고 있을 뿐인데, 하마 모든 것이 끝나고 마무리할 시점인 양 욕심도 열정도 내려놓으려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회사 등, 여느 조직에서도 감초와 같이 빠지지 않고 사용하는 말에 열정이라는 단어가 있다. 영어로는 Passion이다. 너무 자주 쓰는 단어이다 보니 대부분 열정이라는 하나의 뜻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Passion이라는 단어에는 무릎을 치게 하는 또 다른 뜻이 있다. 열정의 뜻만이 아니라 ‘울화통, 격노’라는 뜻도 있다.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내가 못날 때, 나쁜 짓을 볼 때 분통이 터져야 하고, 그래야 열정이 생긴다. 그러니 Passion에는 분노라는 의미도 있는 모양이다.
의사이자 실낙원으로 유명한 소설가, 와타나베 준이치의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라는 책을 읽었다. 그는 둔감하게 살라고 주창한다. 그 제목만 보고 세상사를 멀리하고 홀로 편하게 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둔감하게 살라는 것은, 작은 일에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자기 생각을 단단히 하라는 것’이지, 무관심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 많지도 않은 나이에 다 내려놓고 물처럼 살라는 말에는 아직은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아직이라기보다 살아 있는 한 그렇게는 되지 못할 것, 아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열정이 없는 삶이 어찌 사는 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