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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May 02. 2024

상처를 준 녀석이 생각나(2)

그 녀석이 진짜 내게 상처를 준 것은 두 번째 이야기야. 초등학교 때는 도시락을 싸가기도 했고 집이 가까운 아이는 점심시간에 후딱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되돌아오곤 했지. 나도 집에 와서 점심을 먹거나 도시락을 가져가거나 했어. 도시락 반찬은 단무지나, 멸치볶음이면 최고였지. 고추장이나 된장 한 덩이를 반찬으로 가져오는 친구도 있었던 시절이니까. 근데 그날은 처음으로, 진짜 난생처음으로 엄마가 달걀부침을 밥 위에 덮어주신 날이었어. 내 생일도 아니었는데. 키우던 닭이 알을 두 개를 낳아서 그랬던가? 오전 수업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어. 따르릉. 드디어 점심시간을 알리는데 하필 선생님께서 내게 교무실로 심부름을 보내는 거야. 반장을 두고 왜 나를? 원래 궂은일은 ‘副’ 짜 달린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 다녀와야지. 어쩌겠어.

     

근데 문제는 우리 교실은 본관과 멀리 떨어진 산 중턱에 있었던 거야. 학교 정문을 나오자마자 오른쪽으로 계단이 있는데 그게 무려 365 계단이야. 그걸 올라가야 우리들의 교실이 있었어. 졸업앨범에도 ‘365 계단을 오르며…’, 이런 제목으로 사진도 있는데 실제로는 300 계단이 좀 안 될 거야. 365 계단은 아니었지만 까마득한 높이이기는 했어. 계단은 거칠게 가공한 화강암으로 되어 있었어. 우리의 놀이터이기도 했어. 내려올 때는 철제 난간에 엉덩이를 걸쳐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오다가 계단 밖 수풀 속으로 처박히기도 했지. 그렇지만 다친 놈은 아무도 없었어. 한참 발랄한 어린 시기라 웬만한 충격은 다 흡수했던 모양이야. 또 계단 맨 위에서 구슬을 흘러내리게 해서 구슬 따먹기도 했어. 구슬은 계단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점점 높이 튀어 올라 수십 계단을 내려간 뒤에는 몇 길이나 높이 튀어 올랐고, 끝내는 중력의 힘을 못 이겨 박살이 났지. 그런 방식으로 누구의 구술이 멀리까지 내려가는지를 가지고 구슬 내기를 했던 거야. 계단 이야기가 길어진 것을 보니 어린 시절의 추억이 많았던 장소이긴 한 모양이네.      


그렇다 보니 아직 어린 저학년은 오르내리기가 힘들어 4학년이 되면 그 교실에서 공부했어. 5학년이나 6학년은 왜 안 되냐고? 다 이유가 있지. 그때는 몇 년 선배들까지는 중학교 입학도 시험을 거쳐 선발했어. 그러니 고학년은 열심히 공부해야 하니까 365 계단을 힘들게 올라가야 하는 그 교실로 보내지 않았던 것이고, 중학 입시가 없어진 후에도 전통처럼 4학년이 되면 그 교실로 들어갔던 모양이야. 좋은 중학교를 보내려는 학부모의 열망과 선생님의 열정이 합쳐진 분위기는 지금의 고3 저리 가라였어. 그땐 선생님의 몽둥이찜질이 성적을 올리는 특효약이었어. 엉덩이에 전달되는 몽둥이의 충격을 조금이라도 흡수하고자 6학년생들은 한여름에도 긴바지를 입기도 했고, 엉덩이 속에 두툼하게 헝겊을 덧대어 어기적거리면서 등교하는 선배도 있었으니까.      


설마라고? 상대를 은근히 욕할 때 ‘엿 먹어라’라고 하지? 그 말의 유래를 이야기 줄게. 당시 중학교 중에는 서울의 경기중학교가 전국 최고였대. 그때 입시에 엿을 만들지 못하는 재료가 뭐냐는 문제가 있었대. (별 걸 시험 문제로 다 내었네. 엿 장사로 키우려고 뽑았나?) 4개의 선택 중 ‘무’가 엿을 만들지 못하는 재료라며 그것이 정답이었대. 당연히 ‘무’를 선택한 학생은 틀렸다고 채점되었을 테지. 그러자 학부모들이 들고일어났대. 일부 학부모가 ‘무’로 엿을 만든 경험이 있었나 봐. 그들은 무로 직접 엿을 만들어 교육청에 쳐들어가서 거칠게 항의하며 엿을 던졌대. 무로 만든 엿을. ‘옜다! 엿 먹어라’하면서. 이것이 ‘엿 먹어라’의 유래야. 이건 진짜야.


또 이야기가 옆으로 샜네. 원래 그 장소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神社가 있었고 해방 후에는 신사를 헐어버리고 미군정 사무실을 세워 쓰던 건물이라고 어른들이 말씀하셨어. 우리 학년은 다섯 개 반이었는데 딱 다섯 칸의 교실이 있었어. (전교생이 2천 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50명도 안 된다는군…. 쯥) 신사였던 것은 확실한 것 같아.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양 끝에 화강암으로 된 일본풍의 부도탑(浮圖塔)이 있었던 것이 분명히 생각나거든. 그걸 그때까지 왜 두었는지 몰라. 그 뒤 언젠가 슬며시 없어지긴 했어.     


그렇게 10분 이상 걸려 교무실에 심부름 다녀오니, 모두가 코를 처박고 도시락을 먹으면서도 눈빛과 반 분위기가 영 수상했어. 몇 놈이 킥킥 웃는 것도 이상했어. 드디어 온종일 나를 설레게 했던 도시락을 뚜껑을 열었어. 그런데 아! 온종일 날 두근거리게 했던 달걀부침이 보이지 않는 거야. 달걀이 살포시 앉아 있던 자리에는 노르스름한 자국만 남아 있었던 거야. 순간 눈물까지 핑 돌았어. 그것을 날름 집어 먹은 놈이 그 녀석임을 난 알았어. 녀석은 부자인데도 왜인지 늘 도시락 없이 와서 남의 것을 조금씩 뺏어 먹었거든. 악한 녀석은 아닌데 장난기가 많은 녀석이었지. 도시락 뚜껑을 열고 난 뒤 머리 뚜껑도 열렸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어. (그래서 화날 때 쓰는 ‘뚜껑 열린다’라는 말이 이 사건에서 유래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달걀부침 하나가 이렇게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 웃기지 않아? 아니야. 그땐 학기 초에 선생님이 가정방문이라는 제도가 있었어. 가정형편을 살피고 학부모와 상담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지. 더러는 그때 은밀히 촌지를 받는 ‘선생 김봉두’도 있었다고 해. 그때 선생님께 대접할 음식으로 달걀부침을 내놓은 집도 있었을 정도라니까. 그 정도로 귀한 먹거리였어. 그러니 이것이 기억에 남는 아픔이었다는 고백을 이해해 줘.     


잠자리에서 뒤척이다가 갑자기 기억이 떠올라서 후다닥 써보는 거야. 쓰고 보니 역시 아픔이 아니고 추억일 뿐이네.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 맞네. 첫 번째 이야기는 오히려 행운이기까지 했어. 녀석은 그렇게 4학년만 다니고 또 다른 학교로 갔어. 서울로 전학 갔다는 말도 있고 다시 부속 초등학교로 돌아갔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통신이 미비한 그 시절은 그게 끝이었어.      


그나저나 그 녀석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는 정말 궁금하긴 해. 오래전에 동창 누군가에게서 그 녀석이 S대 의대 교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니 들었는지가 확실치 않아. 들었다면 아마도 순간적으로 질투가 치밀어 올랐거나 또 주눅이 들기 싫은 나의 내면 의식이 반사적으로 외면했는지도 몰라. 난 안 들은 것으로 할게, 같은 심리였을까. 큰 충격이나 너무나 싫은 일이 닥치면 뇌가 무의식으로 기억을 거부한다는 정신의학 용어가 있던데 뭐더라. 기억억제 현상? 하여튼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들었는지 아닌지도 기억이 나지 않아.     


난 두 가지 일 때문에 녀석이 잊히지 않지만, 녀석은 고작 일 년만 다닌 학교이니 기억에도 없을지 몰라. 나에 대한 기억도 없을 테고. 더구나 이 이야기는 더 기억에 없을 거야. 그러니 말자.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잘살고 있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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