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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후 Nov 16. 2024

영화 <드라이브>

세상 속 비열함과 맞서는 법


                                                  *스포 주의*

                제 의견이 영화 감상에 방해가 될 수 있으므로 영화를 먼저 시청하고 읽으면 좋습니다.




<드라이브>는 표면적으론 아이를 둔 옆집 유부녀를 지키려는 한 범죄 전문 드라이버의 이야기다.

하지만 무언가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던지는 아름답고도 가혹한 메시지가 있다. 그건 무엇일까?


영화의 플롯과 캐릭터들의 특징들이 영화 <레옹>을 떠오르게 하는 점도 있었다. 

범죄에 가담하는 차가운 주인공이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 현실과 타협하고자 마음 한편에 버려두었던 인간성을 다시금 회복하고 그들을 지키는 것을 폭력의 동기로 사용하는 이야기가 특히 그렇다.


삶에 대한 의지가 타인에 대한 사랑과 접목되어 비참할 정도로 만연한 세상 속 악들로부터 그들을 지키는 모습은 분명 감동적이다. 비열한 사람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타인에 대한 사랑은 일종의 희망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상처받고 타인에게 구원받는 우리의 인간관계 속 모순들은 타인을 향한 사랑이라는 개념을 무마시키기 쉽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순들은 교훈과 깨달음보다는 혼란과 분개의 감정을 더 많이 낳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란한 감정 기복은 사랑과 존중 같은 도덕적 감정들을 왜곡하고 억누르는 크나큰 부담으로 다가오기 쉽다.

그리고 이런 감정들의 칼끝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또 다른 타인에게는 물론이고 나 자신한테 향하게 된다. 그렇게 타인과 나를 아무렇게나 난타질한 결과 우리는 또 다른 상처를 안고 산다. 대부분의 경우 그 상처는 수치심과 후회다. 적들이 나에게 준 상처가 분개를 낳는다면 내가 타인에게 준 상처는 대개 수치심을 낳는다. 이 두 감정은 한 가면의 두 모습과도 같아서 우리를 아주 기발한 방법으로 괴롭게 한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고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는 것이 인간의 가장 깊은 본능이다. 분개와 수치심이 우리를 깎아내릴 때에도 우리의 옹이투성이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구원에 대한 바람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사랑으로 드러난다. 보통 정열로써의 사랑이 아닌, 헌신으로써의 사랑 말이다. 

수치심(본질적으로 분개와 같은 감정)이 만든 지독한 무기력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타인과 나 자신에 의해 낮춰진 나의 모습을 다시 숭고한 위치로 올려놓아야 한다. 이때 진정으로 '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지가 피어난다. 진정으로 강인하고 선한 사람이 되어서 자신을 깎아내리던 수치심과 트라우마를 내려다보며 비웃는 것이다. 이래서 트라우마로부터 탈출해 최고의 위치로 오른 사람들이 언제나 어둠 속에 빛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악은 우리로부터 수많은 것들을 빼앗아가지만 우리는 이에 맞섬으로써 우리는 상상 이상으로 위대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순수한 의지는 헌신으로서의 사랑과 연결된다. 왜냐하면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영역을 더 이상 증오와 경계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보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인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나의 상처받은 마음 때문에 다른 타인과 나에게 상처 준 도덕적 잘못에 대한 구원의 애잔한 표현이자 사랑이라는 소중한 감정을 책임감과 강인함을 통해 지키겠다는 표식이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과거가 그리 잘 조명되지 않는다(어쩌면 사람들이 더 쉽게 인물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주인공(드라이버)은 범죄 전문 드라이버다. 낮에는 차 정비소에서 섀넌이란 동료와 함께 일하며 돈을 벌었다. 은행털이 등에서 경찰을 따돌려 안전히 도망가는 일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옆집의 유부녀와 그녀의 아들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남편은 일주일 후 출소할 예정인 죄수였고, 그가 없는 사이 드라이버(주인공), 아이린(유부녀)과 그녀의 아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에게 사랑이라는 반가우면서도 낯선 감정이 피어오른 것이다. 이후 남편(스탠다드)은 출소하지만 문제가 생긴다. 스탠다드는 감옥에서 상당한 빚을 진 상태였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드라이버와 함께 전당포의 돈을 털기로 한다. 그러나 일이 틀어져 스탠다는 총에 맞아 죽고, 그 배후에 니노라는 자가 돈을 빼돌리기 위해 한 짓임이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동료 섀넌 역시 죽임을 당하게 된다. 동료와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을 죽이고 아이린과 그녀의 아들이 사는 아파트 근처에서 총을 숨긴 채로 어슬렁거리는 니노의 부하를 보고 그런 니노의 행보에 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초초하고 분노하도록 만들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는 그의 거침없는 복수가 펼쳐진다. 그것은 단순히 복수를 넘어서 아이린과 그녀의 아이를 지키고자 한 헌신의 결과였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복수를 마친 드라이버는 아이린을 떠난다. 당연히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여기서 그가 추구했던 사랑이 저돌적이고 정열로 가득 찬 사랑이 아니라 구원의 문제와도 관통하는 헌신으로써의 사랑이었음이 드러난다. 다른 말로 그것은 사랑 이상이었던 것이다. 아니, 사랑이 항상 모든 것 이상의 것인 걸까?




사랑에 대한 영화의 부드럽고도 거친 표현은 이 영화의 아름다운 점이다. 그러나 영화는 한 걸음 더 앞서간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자. 사랑하는 이가 있는데 내가 무능력하거나 겁쟁이라면? 그래서 사랑하는 이가 죽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 여기서 영화는 조금은 잔인하지만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한 태도에 대해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바로 괴물이 되라는 점이다.



이제부터 이야기가 좀 더 심오해진다. 괴물이 되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괴물 자체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괴물에게 잡아먹히라는 것이 아니라 괴물을 잡아먹으라는 얘기다.


영화 <배트맨>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배트맨으로 활동하는 브루스 웨인의 대담한 범죄 소탕 모습을 본 그의 집사 알프레드가 그에게 말한다. 

(알프레드) "주인님은 내면의 괴물에 먹히고 있어요."

(브루스) "나는 그 괴물을 이용해 사람들을 도우려는 거예요"


사회에 판치는 악의 세력을 단순한 공권력과 솜방망이 처벌로는 절대 사라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브루스 웨인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박쥐 그 자체가 되어 자신의 이 두려움을 되려 범죄자들에게 심어줌으로써 범죄율을 낮추었다. 비록 그 방식이 불법이라도 말이다. 그는 박쥐 공포증이라는 마음속 괴물을 오히려 자신의 수하로 만들어 악과의 싸움에 헌신하도록 만든 것이다. 


캐나다 출신 임상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 교수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사이코패스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내 안의 사이코패스를 키워야 한다", "폭력을 휘두를 능력이 없다면 당신은 그 폭력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먼저 세상은 극히 잔혹한 곳임을 받아들이고 이제부터 '착함'이라는 가면을 쓴 나약함을 없애어야 한다. 당신이 만약 '착한 아이 증후군'을 가졌거나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세상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강해져야 한다. 다만 당신의 선한 본성을 비난하진 말자. 영화 <드라이브>로 비유하자면 아이린과 그녀의 아이는 인간의 본질적인 '선한 본성'이고 이들을 지키려는 드라이버는 '강함'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선한 마음'이다. 칼을 마구 휘두르면 안 된다. 칼을 넣을 칼집을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칼을 휘두르는 이유도 선한 의도여야 한다. 나의 마음을 무장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근본적으로 강함 그 자체에서 오는 게 아니라 선한 의도로 무장한 마음가짐이다.



세상에는 파렴치한 인간들이 넘쳐난다. 이들은 정상적으로 바르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앞길을 방해하고 그들의 낮은 자존심을 위해 다른 이들의 위엄과 자존감을 깎아내리려 무엇이든 할 것이다. 이들 중에는 뻔뻔하게 대드는 부류가 있고 뱀처럼 교활하게 접근해서 살금살금 당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부류가 있다. 이들은 이성적인 대화가 절대 통하지 않는다. 이들이 당신처럼 어느 정도 합리적인 마인드를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세상이 기본적으로 선한 곳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위에 언급한 뱀 같은 부류는 알아차리기 매우 어렵기 때문에 먼저 당신이 당신의 영역에 장벽을 세워두는 것이 좋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본인의 의견을 당당히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기본적인 태도를 습관화해라. 

화를 내는 것이 어색하다면 당신이 화를 낸다는 것이 격분하여 언성이 높아지는 것으로 보기 때문일 수 있다. 화를 잘 내는 것도 기술이다. 팁을 주자면 화를 낼 때 주변 분위기를 무겁게 하고 논리적으로 해야 한다. 나름 타당한 논리가 갖추어졌을 때는 질문형으로 공격하라. 




내가 <드라이브>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연출이 있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니노의 동료 부하는 섀넌에게 악수를 권하고 손을 잡았을 때 재빨리 반대쪽 손으로 상대의 팔 정맥을 그어 죽인다. 여기서 악수는 위에 말한 뱀 같은 부류의 인간이 권하는 독이든 사과와도 같은 것이다. 호의를 받으면 감사히 해야 하지만 상황에 맞지 않거나 의심스러운 호의를 베풀 때는 쉽게 넘어가면 안 된다. 드라이버의 경우 부하 놈이 악수를 권했을 때 섣불리 손을 뻗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세상 속 비열함과 맞서는 방법을 모르는 자와 아는 자의 차이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긴 여정의 일부를 여정 자체로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언제나 강해지고자 하는 마음은 구원과 사랑에 대한 합당한 반응일 때 유효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드라이버가 폭력을 위한 폭력이 아닌 사랑하는 이들의 안전을 위해 이를 사용했듯이 우리도 폭력의 이유를 잊어서는 안 되며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보다 더 숭고한 무엇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운동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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