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염치없이 스며드는 바닷물의 심술을 달래고,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을 내미는 암반과 사투를 벌이는 등, 담맘 현장은 극심한 난공사를 헤쳐갔다. 갈 길은 바쁜데, 잊을만하면 모래바람이 습격해 작업자들을 무장해제 시켜놓고, 열풍은 작업자들을 북어처럼 말려 놓고 사라졌다.
그런 중에도 시간은 말없이 흘러, 1976년이 저물고, 3년 차인 1977년이 밝았다. 완공일이 2개월 앞으로 다가왔는데, 작업 실적은 71.29%로 예정 공정 91.30%에 20%나 뒤지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진도라면 6개월 정도의 공사 지연이 불가피했다.
공기도 문제지만 공사비가 과다하게 들어가 중간 정산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회사는 국내 공사와 필리핀, 괌 현장에서 번 돈을 퍼붓고도 모자라, 회사채를 발행해 부족한 자금을 조달했다. 담맘 공사는 국제개발의 물먹는 하마 신세로 전락했다.
새해 들어 최 소장이 맥을 못 춘다. 연신 기침을 하고 쉴 새 없이 콧물을 닦아댔으며 두통을 호소했다. 감기인가 했는데 감기치고는 너무 오래갔다. 며칠 전부터는 허리부터 무릎 발목 관절이 아프다며 얼굴 펴는 날이 없으니, 본래 최 소장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병이 나면 대책이 없었다. 캠프 내에 의사가 있기는 했으나 있으나 마나, 어떤 환자든 아스피린이나 주며 시간이 약이라는 말만 했다. 상비약이나 받으러 갈 뿐 직원은 물론 근로자조차 그에게 진료받으러 가는 사람은 없었다.
회사로서는 계약서 상 의사를 두어야 하기에 구색을 맞췄을 뿐이지, 실력 있는 의사라면 이 더운 나라에 오겠느냐는 게 모두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남자 성기에 구슬 다는 건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그런 목적으로 찾아가는 사람이 주 고객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병이 나면 그냥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소장이기에 그는 아랍어를 하는 염 부장을 앞세워 현지 의사를 찾아갔고, 냉방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몸이 과도한 실내외 기온 차에 적응을 못 해 생기는 병이며, 생활환경을 바꾸는 것 외에는 치료방법이 없다는 게 의사의 소견이었다. 에어컨을 끄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국 사우디에 있는 한 해결 방법이 없는 셈이었다.
직원들이 귀국을 적극 권유했지만, 그는 죽더라도 현장에서 죽겠다며 응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증세가 악화돼 거동조차 어려워지자, 그는 병석에서 결재와 대책회의를 이끌며 공사를 지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