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도와줘'라는 앱을 사용한다.
치매 가족을 둔 아들에게 이 앱은 불안한 일상을 지탱해 주는 고마운 도구다. 엄마가 평소 머무는 장소를 '안심존'으로 설정해 두면, 엄마가 그 경계를 벗어나는 순간 내 휴대폰으로 알림이 온다. 과거 엉뚱한 곳에서 헤매셨던 아찔한 경험을 떠올리면 엄마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것 만으로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그런데 화면에 뜨는 문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서늘해진다.
[알림] 대상자가 [집]을 이탈하였습니다.
'이탈'
사전적으로는 줄이나 대열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하지만 엄마의 위치를 알리는 문구로 마주하기엔 너무 차갑다. 마치 궤도를 벗어난 기차나 통제 구역을 벗어난 관리 대상을 감시하는 기분이 든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물론 앱을 만든 사람 입장에선 짧고 명확한 단어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단어 하나가 엄마와 나 사이를 '보호'가 아닌 '감시'의 관계로 정의해 버리는 것 같아 자꾸만 눈에 걸린다.
엄마는 길을 잃은 것이지, 대열을 이탈한 낙오자가 아니다.
이 단어를 대신할 좀 더 부드러운 표현은 없을까 고민해 본다.
"엄마가 안심존 밖으로 마실 나가셨어요."
"어머니가 조금 더 먼 곳으로 산책을 시작하셨습니다."
단어 하나만 바꿔 읽어도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이탈'이라는 글자를 보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다급해지지만, '산책'이나 '마실'이라는 단어는 조금 더 차분하게 엄마를 기다릴 준비를 하게 만든다.
우리는 보호가 필요한 분들을 어떤 시선으로 대하고 있을까.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그들을 정해진 틀 안에 가두고, 거기서 조금만 벗어나도 '오류'나 '이탈'로 규정해 버리는 건 아닐까.
엄마는 기억을 조금씩 잃어갈 뿐, 인격까지 잃은 존재가 아니다. 엄마가 안심존 밖으로 나가는 건 통제해야 할 돌발 행동이 아니라, 어쩌면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찾으러 떠나는 엄마만의 여정일지도 모른다.
기술은 점점 좋아지지만, 그 기술을 채우는 언어엔 아직 사람의 온기가 부족하다.
비단 앱의 문구뿐만 아니라, 엄마를 대하는 나의 말투와 시선 속에도 엄마를 '통제 대상'으로 여기는 마음이 스며있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단어는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행동을 만든다.
화면 속 알림은 여전히 차가운 단어를 내뱉겠지만, 적어도 내 마음속에선 그 단어를 따뜻하게 번역해서 읽으려 한다.
"아, 엄마가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멀리 구경하고 싶으신가 보네."
엄마를 안심존이라는 틀 안으로 강제로 '복귀'시키는 게 아니라, 엄마의 그 길고 외로운 산책길에 조용히 동행해 주는 아들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우리가 쓰는 언어가 조금 더 다정해질 때, 치매라는 어두운 터널도 조금은 덜 춥게 느껴질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