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쓴 맛이 싫어서 커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
작가님, 커피 한 잔에 글 쓰기 좋은 오후네요.
꺼내고 싶은 이야기는 많으나 내가 살아온 모양새를 닮은 말을 고르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니 무엇이든 해보기 위해 브런치를 켭니다.
첫 글을 쓰기 위해 들어왔습니다.
맨 윗줄에 있는 '작가님, 커피 한 잔에 글 쓰기 좋은 오후네요.'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입력을 누르면 사라지는 대기멘트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커피요, 커피. 저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데요..
그렇다면 첫 글은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로 합니다.
제가 가진 커피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7살 경입니다.
아빠는 삶은 밤을 커피 스푼에 가득 긁어담아 설탕을 잔뜩 넣어 달게 탄 밀크커피에 적셔 먹여주곤 했습니다.
7살 아이에게 커피는 당연히 금단의 열매였고, 저는 밤과 커피가 만나 이루는 맛의 조화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렇게라도 커피를 먹는다는 사실이 극도의 흥분감과 쾌감을 주었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어릴 때는 왜 그렇게 금기사항을 어기는 것이 짜릿할까요?
갈색 맥심 머그잔에 들어갔다 나오는 작은 스푼에서 두 눈을 뗄 수 없었던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면 컵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이렇게도 강렬하고 자극적인 첫 조우라니, 커피는 앞으로의 제 삶에서 언제나 가장 강력한 유년의 일탈과 갈망의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라는 문장으로 뒷 이야기를 이어가면 조금 뻔한가요?
다행히도 그와 정반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제가 10대가 되었을 때, 커피 애호가인 엄마는 커피 수업을 들으러 다니며 모카포트며 원두 그라인더를 구비해두고 집에서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식탁에 앉아 있으면 느껴지는 묵직하고 향긋한 향에 홀려 악마의 음료같은 그 검은 액체를 입에 댄 순간의 제 감상은 '엑, 쓰다!' 였습니다.
네, 제가 커피를 마시지 않게 된 특별한 계기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냥 맛이 없더라고요.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각성 목적으로 커피를 마시는 친구들이 생기고, 성인이 되니 카페에 가면 저 빼고 모든 친구들이 커피를 주문합니다. 그럼 저는 묻습니다.
"그 쓴 커피를 무슨 맛으로 마셔?"
그럼 친구들이 대답합니다.
"마시다보면 맛있어."
저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친구들은 되묻습니다.
"너는 왜 커피를 안 마셔?"
그럼 저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합니다.
"쓰잖아."
종종 친구들이 웃으며 놀립니다.
"아직 어른이 덜 됐고만."
저는 코웃음을 치며 그런 말을 무시하곤 하지만 쿨한 어른이 되고 싶었던 저는 사실 커피 마시는 행위를 동경합니다. 선호하는 맛의 결이 있고 자주 찾는 카페가 있고 늘 마시는 커피 메뉴가 있고 그 향을 잠깐 즐기고 묵직한 머그를 들어 올려 커피를 홀짝이는 그 일련의 과정을요. (물론 실제로 소리내며 마시는 건 싫어합니다.) 그리고 커피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도구들은 그 모양새며 소리들이 왠지 멋있지 않나요? 불에 올린 모카 포트가 폭닥폭닥 커피물을 밀어 올리는 소리며 쐐액거리며 열을 내는 스팀기같은 것들이요. 핸드드립용 주전자는 그 주둥이와 손잡이의 매끈한 선이 또 어찌나 관능적인가요.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왠지 저 커피에서는 천상의 맛이 나지 않을까 하는 헛된 상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유혹적인 검은 액체는 입술에 닿는 순간 제 기대를 산산이 부수지요. 마치 지하철역에서 치명적인 냄새를 풍기며 지나가는 이의 발걸음을 붙잡지만 실제로 입에 넣으면 기대만한 맛은 나지 않는 델리만쥬처럼요.
자주 만나며 가까이 지내는 이가 커피 애호가라 같이 좋은 카페를 찾아가고는 하는데 그들이 주로 찾는 카페에는 논커피 메뉴가 잘 없다는 사실을, 함께 카페를 다니며 알게 되었습니다. 원두며 추출 방식에 따라 수십가지의 조합이 가능한 위풍당당한 커피 메뉴 아래 조그맣게 구색맞추기 용으로 써 놓은 논커피 메뉴를 볼 때는 왠지 커피를 마시지 않고도 입 안이 씁쓸합니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은 좋은 공간을 즐길 수도 없다는.. 건 아니겠지만 아쉬울 때가 자주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커피를 안 마시는 사람보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훨씬 많으니까요. 아무튼 저는 그럴 때마다 커피는 마시지 않지만 카페는 가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논커피 메뉴를 지켜내야지, 생각합니다. 어쩌다보니 저는 지금 이 글도 좋아하는 카페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밀크티를 마시며 쓰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커피 메뉴보다 논커피 메뉴가 더 많은 카페를 열어볼까 하는 생각도 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