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졸업 선언
회사원으로서의 삶은 향후 5년이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어차피 5년 뒤에는 그만 둘 생각이었다. 직장인의 최후는 ‘인력사무소’라고 늘 생각해 왔다.
퇴사를 한다.
내 삶의 활력은 집에서 만들어져 직장에서 죽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농간을 멈추기 위한 결정이다.
공공기관에서 일한다는 것은, '안정적'이라는 표현으로 포장한 '내 능력의 한계를 스스로 긋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평생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감사 자료를 내고, 실적 자료를 취합하고, 공문서를 쓰면 결국 삶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 내게 남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나로서 존재한 것이 맞는 것일까.
복지가 좋은 회사에서 일하고 정시 퇴근하여 퇴근 후의 삶을 즐기면 되지 않느냐는 말은 사실상 위로에 가깝다.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 나서 집에서도 생산적인 무언가를 할 수도 없거니와, 만일 무리해서 나를 쥐어짜 낸다고 하더라도 휴식 없는 삶이 계속되는 것인데, 휴식 없는 마라톤이 언제까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든 것은 적당할 때 가장 아름답고 평화롭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벌고, 적당히 쉬고, 적당히 노는 것의 조화가 어우러져야 삶이 평화롭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직장인들에게는 그런 삶은 유토피아 격이다.
일단 일하는 시간이 너무 길다. 아침에 눈뜨면 허겁지겁 아침식사를 하고, 헐레벌떡 출근해서 자리에 앉는다.
망부석처럼 계속 일만 하다 점심시간이라는 한 시간의 여유가 찾아오면 후다닥 점심식사를 하고, 대충 커피 한 모금 머금고, 소화시킬 틈도 없이 다시 컴퓨터 앞에 자리한다. 퇴근 시간까지 업무를 마쳐야 하기 때문에 또 마치 중독자처럼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움직이는 거라곤 요리조리 굴러다니는 두 개의 동공과 손가락 열개뿐이다. 운이 좋아 제시간에 일을 마쳤다면 정시에 슬그머니 일어나 퇴근하는 것이 가능하나, 대부분의 경우 단 30분이라도 더 업무를 봐야 내 일을 마칠 수 있다.
정시에 퇴근하든, 야근을 하든 그 후의 삶은 거진 비슷하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이다.
가족과 식사를 하든, 친구와 식사를 하든, 혼밥을 하든, 직장동료와 함께 하든 저녁식사를 하는 것으로 하루의 마감을 스스로 알린다. 안도의 한숨과 다가올 내일에 대한 불안의 한숨이 한 데 섞여 알 수 없는 연기가 된다. 공기에 흩어지는 연기를 뒤로 하고 일어나 본격적인 내 삶을 산다. 허가된 시간은 지금 뿐이다. 내 삶에서 내가 주도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나의 삶을 아름답게 채워주는 시간은 저녁식사 후 여덟 시부터 잠들기 전인 열두 시까지, 딱 네 시간. 24시간 중에 온전히 4시간만이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시간이다. 물론 휴식시간 포함.
주전부리라도 하면서 영화 한 편 보며 휴식을 취하려다 보면 취미생활을 못한다. 취미생활을 하려다 보면 운동을 못한다. 운동을 하려다 보면 휴식을 못한다. 하지만 이것도 내가 정상적으로 퇴근을 한다면이라는 전제다. 혹여라도 조금 피곤한 날에 일찍 잠들고 싶으면 4시간은 더 짧아지기도 한다. 오늘 하루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오늘 내가 만난 사람들은 어땠는지, 내일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하다 보면 어느덧 잠을 잘 시간이다. 달콤한 꿈을 위해 눈을 감으면 어찌나 빨리 아침이 찾아오는지 눈을 뜸과 동시에 다시 허겁지겁 아침식사를 하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이 삶은 대부분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지속된다.
이렇게 살다 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봤을 때 내가 찍어온 발자국에 나는 얼마큼 당당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인생사 새옹지마다. 너나 나나 이렇게 저렇게 아등바등 살지만 사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별 거 아니다. 그래, 별 것 아니다. 인생 아무것도 아니다. 어쩌면 생명이라는 것이 살아 숨 쉬는 것은 과학적인 원리로만 설명이 가능하다.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은 미래의 뇌과학자들이 밝혀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상당히 과학적인 이유로 태어나고, 숨 쉬고, 죽는다. 낭만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안에서도 아름다움을 찾는다. 기계가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태어난 김에 나의 뜻을 한껏 펼치고 죽고자 하는 심리는 인간 누구나 보편적으로 갖고 태어난 본능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직장인으로의 삶은 내가 추구하는 인간다운 삶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내가 원하는 삶은 이렇다.
온전히 느끼고, 온전히 누리는 삶.
음과 양의 조화로움이 가져다준 평온함이 가득한 삶.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그대로의 삶.
그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삶.
그래서 나는 퇴사를 한다. 나의 삶을 보다 자연스럽게 살기 위해 퇴사를 한다. 직장인으로서 성공한 삶을 사는 것보다, 조금 더 불안정하더라도 기쁨과 감사가 자연스레 베어 나오는 삶을 추구한다.
회사의 성공이 나의 성공을 대변하는 시대는 지나도 한참 전에 지났다.
내가 흘린 피와 땀은 모이고 모여 나에게 돌아온다고 볼 수 있을까? 온전히 내게 돌아오는 게 맞을까? 글쎄.. 어딘가로 새고 있지는 않을까? 사장의 주머니라던지, 나라의 주머니라던지.. 정말 내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고 있는 게 맞을까?
의사 선생님은 내게 "당신은 태어난 것부터 이미 모든 것을 이룬 존재" 라며, "나머지의 삶은 그저 누리라"라고 하셨다. 나는 나의 삶을 누리고 싶다. 나를 더 잘 알고 싶다. 내가 더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주고 싶고, 내가 흥미를 가질만한 것들을 스스로에게 많이 보여주고 싶다. 예술적 영감의 원천을 찾아 주고 싶고, 다채로운 경험을 통한 성장과 발전을 응원하고 싶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만나고, 다른 문화를 접함으로써 내가 가져보지 못한 문화 정체성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고 싶다. 나는 내 삶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살아내고 싶다. 나는 용기를 내고 모험을 떠나고 싶고, 그 모험을 통해 한 뼘 더 성장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을 조각해 나가다가도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콜라주를 하고 싶다.
나는 언젠가 죽는다.
인간은 누구나 끝이 있는 인생을 산다.
지금 당장 생각해서는 오늘도 평범하게, 내일도 평범하게 살아낼 것 같지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사람일이다. 내 인생에 언젠가 끝이 있다면 나는 일분일초도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오롯이 살아내고 싶다. 나의 색깔을 꼭꼭 눌러 담아 나의 인생을 채워나가고 싶다. 그렇게 살다, 어느 날 갑자기 죽어도 어떤 후회도 남지 않도록 온전한 나의 삶을 살아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퇴사를 한다.
나는 내 선택을 믿는다. 내 결정을 믿는다.
나는 내 결정에 책임을 지고, 내 책임을 응원한다.
나는 죽는 날까지 자유 앞에 담대하게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