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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늘보 Apr 11. 2022

서른셋, 인데 괜찮니?

그들의 조언은 도움을 주기 위한 게 아니다.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기성세대 누군가에게 나의 공기업 퇴사 사실을 알리자, 하나같이 비슷한 반응이다. “젊을 땐 홧김에 그럴 수 있어.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 해봐. 이제 적은 나이도 아니잖니?”


누구나 내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환상이 있다. 미련이 있다. 내가 하지 않았던 선택을 종종 떠올리고 “만약에..”라는 단서를 단 희망고문을 한다. 


타인의 삶에 참견할 때, 그리고 나의 앞길을 예측할 때,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것들을 기반으로 점친다. 와중에, 내가 걸어왔던 길과 가장 유사한 길이 ‘맞는 길’이었다는 사실을 은연 중에 슬쩍 흘린다. 그래야 내 인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 인생 나처럼 살지마라”는 조언은 어디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 나처럼 사는 게 그나마 정답에 가깝다”는 오지랖은 슬슬 지겨워질만큼 많이 들었다.


기성세대는 나의 나이를 걱정한다. 적지 않은 나이인데 정말 괜찮겠느냐고 물어본다. 젊은 날의 패기로 인생이 다 부질 없어 보이고 재미 없어 보여서 그런 선택(=안정적인 직장을 그만 둬 버리는 짓)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인생을 장기적으로 봐야지 코 앞만 봐서는 안된다고 조언한다.


세상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격변하고 있다. 그들 조차 살아보지 못한 세상을 우리는 살아 갈 것이다. 그들이 보내 온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미래를 예상 해 볼 수는 있겠으나 그게 나의 미래를 완벽하게 점칠 수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은 아니다.


그들의 30대와 나의 30대는 다르다. 스마트폰이 이 세상에 등장한 것이 약 10년전이다. 고작 10년 전. 우리는 원래 돈을 송금하려면 은행에 방문 하거나, ATM기를 쓰거나, 인터넷 뱅킹을 하거나, 폰뱅킹을 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플 하나를 켜고 손가락 두어번 콕콕 찍고 밀면 돈이 송금되는 시대다.


우리의 생활을 둘러싸고 있는 하나부터 열까지, A부터 Z까지 모든 것들이 변화하고 있다. 빠르게 변하냐 천천히 변하냐 그 차이일 뿐이다. 가만히 있는 것 처럼 보여도 미세하게나마 변화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본래, 자연은 그 무엇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우리도 변한다. 그리고, 변해야 한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꼭 일을 잘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일을 많이 하는 것이 내 업무의 중요도를 결정 짓는 것도 아니다. 열심히 하는 만큼 어떤 의미로든 보상 받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 중요한 건, 노력보다는 센스와 타이밍이다. 흐름을 읽는 안목이, 앞만 보며 달리는 것보다 중요해졌다. 방대한 양의 정보를 얻고 선별 할 줄 아는 센스와 적당한 타이밍에 그 정보를 결합 해 무언가를 창조 해 내는 능력이 앞으로의 현대인에게 필요한 기술과 자세다. 


그것을 위한 멀티플레이가 가능하도록 최대한 많은 것에 적당한 여유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적어도,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파악할 여유정도는 필수다.


'적당히'라는 말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

내가 추구하는 삶은 '무엇이든 적당한 삶' 이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쉬고, 적당히 휴식하고, 적당히 놀고, 적당히 어울리고,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고독하고, 적당히 배우는 뭐든 적당한 삶.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조언이 내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적당함을 내게 제안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맥주 한 잔이 적당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소주 한 병이 적당할 수 있다. 각자 간에서 해독하는 능력이 천차만별이다.  술을 한 잔도 못하는 사람에게는 한 모금도, 한 잔도, 적당하지 않다. 그런데 이 적당함은 상황에 따라 또 달라진다. '함께 마시는 사람들과 즐기기에 적당한' 만큼은, '영화보며 혼술하고 바로 누워서 취침하기에 적당한'만큼과는 또 다르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관점과 상황에서의 '적당함'의 기준을 내게 들이민다. 

나는 그가 말하는 그 상황에 있지도, 그 삶의 가치관을 갖고 있지도, 그 관점에서의 삶을 살 준비도 하고 있지 않은데 말이다. 받아들여 도움이 되는 조언들도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내 선택의 몫이다. 내게 필요없는 조언은 굳이 다 주워담을 필요없다. 과감하게 공기중에 흩날려버려도 된다. 


말 하는 사람에겐 말하는 자유가 있듯, 내게는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할 자유가 있다. 인간은 모두 자유로워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두어번 전화를 하며 "왜 이렇게 전화를 안받아?"라며 화를 내기도 하지만, 전화를 받든 말든 그것은 내 자유가 아니던가.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 자유가 있는 것처럼 내게도 전화를 안 받고 내 개인의 시간을 더 향유할 자유도 있는 것이다. 상대방이 전화를 한다고 해서 내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 관계는 사실상 갑을 관계에 더 가까운 것 아닌가. 같은 맥락으로 나는 누군가의 무례한 질문에 대답하기 싫을 땐 대답을 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뭐라고 그들의 질문에 내가 반드시 응답을 해야 하는가? "왜 아무말도 안해?"라는 반응이긴 하지만, "제가 꼭 대답을 해야 하나요?"가 나의 대답이 된다.


나는 괜찮다는데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라는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저 사람은 그러려니 하고 만다. 나는 인생에서 듣는 다양한 조언을 빙자한 오지랖도 이런식으로 대처한다.


타인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 지는 삶을 산다.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들었건 선택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후회하지 않고, 원망하지도 않는다. 선택의 결과를 알고 선택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인생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결정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갈림길에서 그나마 미래가 예측되는 선택을 하는 것이고, 그마저도 언제나 빗나가기 때문에 인생엔 길도, 답도 없는 것이다. 


많고 많은 조언 중에 '나처럼 사는 게 정답이다' 식의 조언은 듣지 말자. 그냥 듣지 말자. 이미 들어버렸다면 흘려보내자. 그 사람의 인생엔 그게 답이었을지 몰라도, 내 인생에서는 아니다. 


나이가 서른 셋이면 어떻고, 마흔 셋이면 어떠랴. 

아름답게 살다 아름답게 죽으면, 그게 몇살이건 그걸로 된 것이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에 늦은 나이라는 것은 없다. 사회가 만들어 낸 한계에 나를 가두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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