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전이었다. 어김없이 열 시에 침대에서 일어나 물을 끓이고 홍차를 우려내 우유를 조금 섞었다. 달걀을 두 개 삶고 오렌지 껍질을 깠다. 느릿하게 아침을 먹고 나갈 준비를 하고 익숙한 길을 걸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의 어느 부분에서 그를 떠올렸는지는 모르겠다.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던 마르고 긴 손가락, 캔버스 너머로 보이던 서늘한 눈썹, 고요함 속에서 들려오던 숨결, 이따금 가볍게 들려오던 웃음소리.
아마도 헤어짐이었을 그날 이후 석훈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왜 그의 집으로 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드리거나 벨을 누른 필요도 없이 현관문을 열자 문이 조용히 움직였다.
박제된 듯 질서 정연한 거실은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였다. 안쪽에 있는 작업실 너머로 햇빛을 받으며 잠들어 있는 석훈의 얼굴이 보였다.
흐트러져있는 루시안 프로이드 화집 사이에 누워있는 얼굴은 지나칠 만치 고요해 죽어 있는 것처럼 느껴져 나도 모르게 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왔어요?”
놀라는 기색 없이 부스스 눈을 뜬 석훈이 나에게 말했다.
“여전히 좋아하나 보네요, 루시안 프로이드.”
석훈이 대답 없이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봤다. 나 역시 말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고작 두 달이 지났을 뿐인데 그가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거대한 별과 지구가 아무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이듯 지독한 침묵이 지나가고 석훈이 입을 열었다.
“담배 한 대 줄래요?”
핸드백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그에게 건네고 어지럽게 널브러진 책상에서 얼룩진 찻잔받침을 소파 옆 협탁 위에 올려뒀다. 창가로 가 창문을 열자 방안을 비추던 햇살이 강해졌다.
소파에 기댄 석훈이 몇 번의 얕은 숨을 내쉬자 손에 들린 담뱃불이 서서히 꺼져갔다. 타들어가는 담뱃불처럼 석훈의 얼굴이 희미해졌다.
“이제 그림은 그리지 않는 거예요?”
내 말에 석훈이 익숙한 미소를 지었다.
“그릴 수 있을까요. 나는 정말로 희령씨를 그리고 싶었어요.”
“알아요.”
석훈의 얼굴은 벽에 걸린 그림처럼 고통스러운 동시에 파리하게 느껴졌다.
“내가 정말로 어리석었군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자 석훈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눈을 감고 누워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담뱃갑에 남아있던 서너 개의 담배를 피우고 방을 나왔다.
작업실 문을 닫고 잠시 귀를 기울었지만 마치 그날처럼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비가 내렸는지 땅이 젖어있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되뇌던 목소리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땅을 밟자 비에 젖은 흙냄새가 올라왔다. 뱃속은 더 이상 울렁거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중얼거리던 석훈의 음성이 이내 흩어졌다. 흙속 어딘가에 파묻혀있을 지렁이를 떠올리며 질척이는 검은 형상 위를 걸었다.
그날이 내가 본 석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