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다 Jul 08. 2024

툇마루에서 아늑한 죽음을

12살의 여름 툇마루와 죽음을 떠올렸다. 초등학생과 죽음, 그리고 툇마루. 언뜻 보면 이질적인 조합으로 느껴지지만 조금만 되짚어나가면 인과는 언제나 단순하다.

그 시절 살던 아파트는 유난히 고요했다. 윗집에는 20대의 여자가 홀로 지냈고 아랫집에는 중년의 부부와 짖지 않는 나이 든 강아지가 살고 있었다. 이따금 윗집에서 아득하고 어설픈 선율로 연주하는 쇼팽의 야상곡이 들려왔다.

5층의 아파트 뒤편에는 놀이터가 있었는데, 신축된 직후 입주가 덜 된 탓인지 아이들이 많지는 않았다. 놀이터에는 모래밭 위로 미끄럼틀과 빨간 그네, 아담한 규모의 놀이터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정글짐과 작은 나무 정자가 있다.

내 나이 대에서 유년에 대한 경험은 크게 두 가지 줄기로 구분된다. 지금으로 치자면 유격훈련 수준의 놀이터에서 진탕 굴렀거나 책벌레였거나. 후자였던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으며 보냈고 창밖으로 아이들의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은 자신만의 네 평 남짓한 공간 안에서 갈색 양장본 표지에 금박으로 멋스럽게 제목이 쓰여 있는 세계문학전집에 매료되어 있었던 시간이었다. 책을 게임이나 친구들보다 사랑하는 어린이를 어른들은 기특하다며 칭찬해주고는 했지만 사실 세계문학전집이야말로 유해매체의 산물이었다.

이른 나이에 고전문학 속에서 온갖 죽음과 불륜, 파국, 득실거리는 욕망, 배신을 읽어나갔다. 작은 활자 속에서 사람들은 온갖 방법으로 죽어나갔다. 벽돌에 머리를 맞기도 하고 연인에게 배신당해 목을 졸리기도, 총을 맞기도, 자살을 하거나 전쟁 통에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스러졌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장들이 이토록 자극적인데 펭귄이 뛰어노는 게임기나 공기놀이가 눈에 들어는 왔을까.

학교에 등교한 이후에도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채 책상아래 책을 숨겨두고 엉뚱한 상상에 빠져들곤 했다. 당시 가장 큰 고민은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죽을까 이었다. 읽던 책의 주인공들이 수도 없이 죽어 나갔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름의 진지한 고민을 거듭하던 어린이는 12살에 툇마루에서 죽기로 결심한다.

지극히 평범에 가까운 환경이었다. 부모님은 교무실에서 연애를 시작했고, 다른 학교로 갈라져 아빠는 수학을 엄마는 세계사를 가르쳤다. 다큐를 종교채널처럼 틀어놓던 엄마 덕에 거실의 티비는 대부분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을 비추고 있었다.

툇마루로 흐르게 된 경로는 어느 날 무심히 방영되던 세계의 정원들이라는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틀어진 채널은 정자체로 쓰인 흰색 자막과 함께 각국의 정원들을 소개해줬다. 화사한 꽃들과 섬세하게 다듬어진 나무로 장식된 유럽의 사랑스러운 정원, 절제된 고요함을 미학으로 삼은 일본의 정원, 거대한 규모로 압도시키는 중국의 정원. 그중 나를 사로잡은 건 녹음이 인위적이지 않게 어우러진 한국의 정원이었다. 자연과 가까이 닿아있는 소박한 정원이야말로 죽음을 맞이하기에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장소를 정했으니 다음 고민은 정원을 어느 위치에서 바라보며 죽는가였다. 정자에서는 객사하는 느낌이고 실내는 정원과 너무 떨어져 있다. 그래서 떠올린 장면이 툇마루에 걸터앉아 녹차를 마시며 나무를 바라보며 죽자였다. 이때의 확고한 결정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흔들림이 없다.

차가 지나지 않는 길목에 서 신호등을 기다릴 때, 정신없이 술을 마시고 푸른 새벽에서야 홀로 집에 돌아올 때, 잠이 오지 않는 날 음악을 틀어놓고 식어가는 찻잔을 앞에 두고 때때로 툇마루를 떠올렸다. 인생의 여러 시기를 거치며 툇마루는 평온함과 비장함이 공존하는 확고한 이미지로서 자리를 잡았다. 건축회사에 입사해 설계를 시작하는 무렵이 되어서야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한옥을 건축해 살아간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몹시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부터다.

건축주와 상담을 진행하다 보면 한옥을 짓고 싶었는데 포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한국은 한옥을 근간으로 삼지만 주거지로써 살아가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신축 건물로 한옥을 짓는 일은 더욱 드물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수록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는 강해진다. 문화와 예술은 전통에서 기인되므로 주거지에서 가지는 미적 욕구는 자연스럽게 한옥으로 향하지만 실천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비용이다.

자재가격이 월등히 비싸고 한옥시장 규모가 작은 탓에 부르는 게 값인 수준으로 인건비가 높게 책정된다. 공사가 까다롭고 공기가 길어 이는 모두 금전적 부담으로 이어진다. 같은 가격으로 다른 구조를 선택할 경우 선택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에 큰 맘을 먹지 않는 이상 결국 철근콘크리트나 목조주택으로 변경하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다.

갈 곳 잃은 욕구는 한옥을 접목하여 대체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갔다. 여기에는 한옥과 비슷한 형식의 골조를 취하는 방법, 한옥 특유의 구조를 택하는 방법, 건물 외관 디자인으로 표현해 내는 방법이 있다.

지리적으로 밀접한 일본에서 택한 목구조는 중량목구조다. 기둥과 보를 세워 구조체의 자연스러운 노출이 가능하기 때문에 건물 외관은 일반 주택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기둥을 이용한 목구조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좀 더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한옥 특유의 구조를 살리는 방법에는 건물 형태로써 전통적인 모양을 살리는 방식이 있다. 한옥의 대표적인 구조는 ㄷ자형과 ㅁ자형이 있다. ㄷ자형 한옥은 거실과 부엌을 중심으로 양 날개에 방을 배치해 균형감을 추구한다. ㅁ자형 한옥은 단절된 부분 없이 연결되어 중앙의 대청마루를 통해 갇혀있는 중정을 바라보게 된다. 구조적으로 본다면 폐쇄적이라 느껴질 수 있지만 각 실을 구분하는 창을 열면 집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순환되는 통로다.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크기 때문에 온기를 가둬두는 동시에 이동시키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한옥의 매스감으로 한국의 특성과 기후에 맞춰 다른 구조체를 이용한 양식을 가져올 수 있다. 일반적인 주택의 형태는 큰 덩어리에 굴곡으로 모양을 조성하지만, 한옥의 형태처럼 건물의 구조를 꺾어 중정을 살리고 작은 별체를 지어 다실 또는 게스트 룸으로 사용하는 식이다.

건물 외관 디자인으로 한옥을 표현해 내는 방식은 이미 많은 곳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오래된 건물을 부분적으로 리모델링하거나 다른 골조의 건물에 한옥을 모티브로 차용해 부분적으로 기와를 얹고, 서까래를 달아매고 창문에 나무창살을 덧대 한옥적 분위기를 살린다.

이처럼 한옥의 형식을 빌린 설계를 하고 보의 위치를 잡을 때면 내가 죽음을 마주할 때 앉아 있을 툇마루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게 된다. 아직 더 훗날의 일이니 전혀 예상치 못한 구조로 설계되어 있을지도, 도리어 한옥의 모습에 근접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죽음에 대한 확고한 결심을 반쯤은 미지로 접어두자 이전보다 더 자주 그 모습에 대해 떠올리게 되었다.

사람이란 그런 것이다. 가늠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더 큰 애정을 품고 관심을 갖는다. 죽음에 관해서 고요하던 마음이 종종 요동치기 시작했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지 않고 죽은 후에는 죽음을 인식할 수 없으니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람은 죽음에 대해 조금도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죽음과 언제나 함께하고 있으며 그것을 동경하기도, 두려워하기도 한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부끄러운 질문을 뻔뻔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취기가 오르면 원하는 죽음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직업 특성상 술을 자주 마시는 Y군은 위스키 반 병을 마신 후에도 평소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내가 취해 있으니 그다지 부끄럽지는 않았다. 생각이 많고 시간이 지날수록 진지함이 강건해지고 있는 그는 이타적 방식의 죽음에 로망이 있다 답했다. 중학교 때 이미 장기기증 서약을 했고, 사고현장에서 누군가를 구조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소망이라 답했다.

어려서부터 친구였던 C군은 통화로 점심메뉴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뜬금없는 내 질문에 잠깐의 고민 후 대답했다.

“글쎄, 요즘에는 노년을 자녀가 책임지지 않는 시대니 노후에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요즘 주식투자와 부동산에 대해 공부하고 있어.”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뜻하지 않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취기가 만연한 분위기에서 H양이 고리키의 ‘이탈리아 이야기'라는 책에 대해 말했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시골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와 역시 아름답게 자란 딸. 엄마의 애인에게 눈이 가버린 딸은 도전을 청한다. 달리기 시합을 하는 둘. 엄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고 패배한 딸. 자신의 정정함에 기뻐 달리기 시합 후에도 춤을 추던 엄마는 심장이 터져 죽고 만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의 H양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렇게 기고만장해서 춤을 추다 죽었으면 좋겠어. 무엇보다도 풀필링한 죽음 아니야?”

해맑은 그녀의 목소리가 알코올로 가득 찬 공기를 울렸다. H양은 누구보다 집요한 감성으로 섬세한 그림을 그려내는 화가인 동시에 파티에서 6시간 내내 춤을 춰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여자였다. 그녀에게 몹시 어울리는 죽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L양을 만난 건 일요일 오후였다. 여름이 오기 직전의 뜨거운 햇살과 선선한 바람이 부는 주말이었기 때문에, 철도길이 있는 공원을 끼고 있는 와인바의 테라스에서 샴페인을 마셨다.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강의하고 있는 그녀는 죽음에 대한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말없이 한동안 내 눈을 바라보던 그녀가 잔을 다 비운 후에야 대답했다.

“나는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를 들으며 운전하다 거대한 나무로 돌진해 자동차와 함께 산산조각 나 죽는 게 꿈이야.”


다음날 출근을 하고 평소처럼 여러 프로젝트를 쳐내고 늦은 시간 퇴근을 하며 공원 경계를 따라 느리게 걸어갔다. 내 키보다 두 배정도 높은 옹벽 너머에는 울창한 수풀이 있고 보이지 않는 아카시아향기가 주위를 에워쌌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를 들으며 절친한 지인의 죽음을 상상한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찌그러진 보닛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차창 너머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녀도 거기까지는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만 떠올리는 것이 낭만이니까. 향으로써만 존재하는 아카시아나무처럼 형체가 흐릿한 이미지 속에서 L양의 삶에 대한 질척한 무드를 느낀다.

 

아이들에게는 죽음보다는 꿈을 물어본다. 전쟁이 가득한 문학을 탐독하던 시절,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을 던졌다. 가장 첫 번째 순서였던 나는 새가 되고 싶다고 답했고 그다음 아이는 소방관, 그다음 아이는 간호사, 그다음 아이는 과학자라고 대답했다.

그때의 나는 장래희망이나 꿈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또래의 아이들은 이런 걸 생각하지 않을까 짐작해 한 대답이었지만 아주 수치스럽고 잘못된 선택이었다. 당연히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없었지만 선생님의 마음속에 새로 살고 싶어 하는 엉뚱하고 감상적인 아이로 남았을 것이다. 말이라는 건 이토록 무섭기 때문에 짧은 문장으로도 그 사람을 정의 내리고 각인시킨다.

무수한 말속에 진실이 숨겨져 있기도 하다. 그 진실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가려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때로는 자기 자신의 말조차.

앞으로 나의 삶은 어떠한 형태로 흘러갈지 알 수 없지만 죽음을 목전에 두고 툇마루 위에서 녹차를 마실 때의 마음만큼은 평안하기를 바래본다.

작가의 이전글 책장 너머에는, 비밀의 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