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철
"야이, 씨팔 병신아 또 죽었잖아."
오락실에서 내 탓만 하는 용석이 녀석 때문에 화가 치민다. 그래도 화를 낼 수 없다. 용석은 우리 학교 짱이다.
더구나 한 번 꼭지가 돌면 앞뒤 가리지 않고 묵사발을 낸다. 이틀 전에도 문현동 뒷골목에서 한판 벌어졌다.
오토바이 소음 문제로 B 중학교 학생들과 시비가 붙었다. 용석이는 그 일당들이 쌍코피가 터질 때까지 두들겨 팼다.
그런대로 나는 사정이 좋은 편이다. 여학생들 사이에 내 입지가 올라갔고 용석이 녀석도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주먹왕도 여학생들과 어울리려면 내가 필요하다.
나는 힙합을 배우고 서열이 대폭 격상해 용석의 심복인 민석과 대등해졌다. 민석은 '부'짱이다.
우리 셋은 2학년, 같은 반이다. 언제나 같이 붙어 다닌다.
우리는 오락실에서 돈이 다 떨어진 관계로 아이들에게 삥을 뜯어 주머니를 채웠다.
오락도 이제 질려서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었다.
"이제 뭐 하지?"
"당구나 치러 갈까?"
"그것도 이제 질려."
그 무렵 길 건너에서 어떤 예쁜 여학생에게 우리의 시선이 머물렀다.
"쟤, 꼬셔서 술 먹을까?"
용석이 말했다. 우리는 명확한 담당이 존재한다. 주먹은 용석과 민석이, 이번에는 내가 나설 차례다.
그 아이는 마침 우리 학교 교복 차림이었다. 노란 명찰로 1학년이다. 나는 자주 쓰던 수법으로 수작을 걸었다.
"너 A 중학교 다니니? 반가워. 2학년 김종철이라고 해."
친근한 말투로 시작했다. 흐름은 늘 비슷한 레퍼토리로 이어진다. 뜻밖의 관심에 놀라고 수줍어하며 나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교회에서 나오던데 교회 다니니? 이따 뭐 하니? 따위의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그리고 나의 난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글쎄, 오늘 우리가 춤 연습을 하기로 했는데, 카세트테이프도 감아주고 춤 평가도 해주기로 한 후배가 갑자기 약속을 펑크냈어."
"그래서 말인데 미선이가 춤 연습 좀 도와줄 수 있니?"
"물론 맨입에는 아니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할 거야."
그 아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러겠다고 말했다.
나는 안도하며 7시에 인근 재개발 아파트 상가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 빈 건물이 우리의 연습실이고 아지트라고 했다. 어른들이 알면 우리가 곤경에 처할 수도 있으니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고 비밀을 지켜 달라고 당부했다.
그 아이는 비장한 표정으로 알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아이는 미세하게 웃고 있었다.
미선
빙의는 한순간 찾아왔다.
처음 헛소리를 경험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간 직후였다.
교회에서 고등학교 언니들에게 과외를 받고, 집에 가기 아쉬운 애들 몇 명과 모여 수요 예배를 드리러 갔다.
예배를 듣는데 목사님 말씀이 잘 들리지 않더니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보니 내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괜찮다, 괜찮아. 예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단다."
느닷없이 목사님께서 나를 달래주셨다. 기도문도 조용히 중얼거리셨다.
친구 혜민이 말에 의하면 내가 전라도 사투리를 쓰면서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다고 했다.
"으메, 징그러운 예수꾼들이구마이. 이히히히히."
혜민의 흉내를 들으니 섬뜩했다. 기억나지 않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어른들이 제압해도 거칠게 반항했다고 덧붙이는 혜민의 표정에 선명한 공포감이 남아있다.
그 후로도 기억상실은 계속 일어났다. 다행히 집이나 교회에서만 발생했다.
교회에 나가는 것도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교회는 내가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인데, 슬펐다. 나는 교회 사람들의 따뜻함이 좋다.
반대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엄하시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없다. 아빠는 내가 어릴 때 선박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기업 이미지가 나빠질 게 두려웠던 회사는 꽤 큰돈을 보상해주었다고 했다. 엄마는 그 돈을 몽땅 들고 연하의 내연남과 야반도주했다.
할머니는 이 얘기를 수백 번 되풀이하셨고, 그때마다 욕을 빠뜨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꼭 눈물을 보이셨다.
아빠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외항선을 탔다. 배를 타면 큰돈을 벌 수 있는 시대였다. 아빠가 부산항으로 돌아왔을 때 할머니의 중매로 맞선을 보았다. 둘이 합쳐서 오십도 안되는 나이에 선이라니.
어쨌든 일사천리로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리고 다시 배를 타러 훌쩍 떠났다고 했다. 배가 출항하면 보통 2년에 한 번 들어왔다.
아빠의 사고로 우리 집은 그야말로 가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나까지 정신을 잃는 일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신병이 왔다며 내림굿을 받아야 한다고 호들갑을 떠셨다.
언젠가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 아빠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다.
"거, 진작에 죽은 아를 와 자꾸 데리고 있노 말이다. 아가 엄마 때문에 가도 못하고 추운 데서 자꾸 떨고 있다아이가!"
할머니는 전라도 사투리를 자기 식대로 경상도 사투리로(감쪽같이 흉내를 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둔갑시켜 말씀하셨다.
얼마 후 나는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어떤 박수무당 집으로 갔다.
없는 살림에 어디서 그만한 돈을 마련하셨는지 뭉칫돈을 꺼내 굿값을 선뜻 내셨다.
굿판은 해가 지고 다시 동이 틀 때까지 이어졌다. 팥을 한 줌씩 쥐고 내 등으로 던지는데 너무 아파서 여러 번 도망칠 뻔했다.
무당은 나에게 들어온 영을 겨우 끌어냈다. 영은 자신을 어떤 도사라고 소개했다고 했다.
그날부터 '나는 중학생 신동 도사'가 되었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교회에 가는 걸 허락하지 않으셨다.
This is a work of fiction. Names, characters, places and incidents either are products of the author’s imagination or are used fictitiously. Any resemblance to actual events or locales or persons, living or dead, is entirely coinciden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