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이버대학에서 강의 촬영 아르바이트를 한다. 분명 휴학 중인데, 학교에 다닐 때 보다 더 많은 교수를 만나고 있다. 오늘 오후 첫 촬영은 부동산학 수업이었다. 녹화가 끝나고 스튜디오를 정리할 때 부동산학 교수가 나에게 말했다.
"인천 빌라왕 피해자들, 그거 다 본인들이 잘못한 거야."
내가 잘 못 들었기를 바랐다. 교수는 뒤이어 부동산 계약이 인생에 몇 안 되는 순간이라도, 부동산 지식을 잘 알아두라고 충고했다. 전세 사기 피해자는 부동산에 무지해 사기를 당했고, 그래서 사기를 당한 일은 피해자의 잘못이다. 그게 교수의 생각이었다.
먹물: 배움이 많은 사람이나 글을 잘 쓰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머릿속에 글자가 많고, 글을 잘 뱉는다는 아주 찰떡같은 비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많이 배웠다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배웠다는 자부심이 자만감으로 부패하는 순간이다.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인정하는 태도,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태도, 너의 약함과 다름을 포용하는 태도. 이런 투명한 마음이 먹물에 가려질 때 지식은 독이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지식을 이용하기도 한다. 전혀 잘못이 아니다. 요리사가 요리로 돈을 벌고, 배우가 연기로 돈을 버는 것처럼 지식 노동자는 지식으로 돈을 번다. 하지만 대학은 달라야 한다. 대학은 교육, 연구, 봉사하는 곳이다. 대학은 지식 저장, 지식 전달, 지식 창출을 하는 곳이다. 대학은 지식을 통해 공공선에 기여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점이 대학을 학원 또는 기업과 구분된 기관으로 만든다. 교수가 지식 기술자가 아닌 지식인이라면, 교수의 교양은 학위나 지식의 총합으로만 판단할 수 없다. 지식을 대하는 태도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횃불은 눈앞에 두고 감상하는 물건이 아니다. 횃불은 높이 들어 주변을 비출 때 제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 부동산 교수를 비판했지만, 나도 다를 게 없는 사람이다. 유퀴즈에서 인문학 교수가 인문학은 잘난척 하고 싶은 맛에 한다는 농담을 했다. 크게 공감했다. 이 농담은 대단한 물질적 보상을 기대하기 어려운 인문학도에게 자부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나도 그 자부심을 소중히 여긴다. 아름다움을 알아봤다는 자부심, 아름다운 것을 배운다는 자부심, 시대의 유행에서 벗어난 길을 내 선택으로 묵묵히 걷고 있다는 자부심. 하지만 공부할 수록 마음 깊숙한 곳에 눌러앉은 지적 허영심을 부정할 수 없었다. 먹기도 버리기도 애매한 상태로 물러지고 있는 냉장고 속 딸기처럼, 내 마음도 자부심과 자만감 사이에 위태롭게 걸쳐져 있었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 어려운 것만큼, 먹물이 세상을 투명하게 보기 어려운 것 같다. 내 대가리에는 먹물이 아닌 지혜를 담고 싶다. 아는 것이 많아지더라도 한없이 투명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 아직 대학원에 갈지 모르겠지만 길어진 가방끈이 생각의 범위를 제한하는 목줄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언젠가 이 글을 다시 읽을 때 지금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