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늦게 재활용을 버리러 나가는 중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1층 우리 동을 나서려는데 잠시 쉬며 앉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곳에 애호박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마트에서는 저것의 2/3 정도쯤의 사이즈만 파는 걸 주로 보아와서 그런가 비교했을 때 꽤 사이즈가 컸다. 길이만 해도 30센티 정도 되었고 지극히 평균에 가까운 내 팔뚝보다 더 두툼한 사이즈였다.
집에 있기 답답하다고 저 혼자 잠깐 마실을 나온 것도 아닐 테고
된장국에 들어가기 싫다며 두 발로 가출을 한 것도 아닐 텐데
쟤는 왜 혼자 저기 덩그러니 있을까.
(혹시 비르소미오 작가님의 글에 등장하는 가출한 양파 각시를 찾으러 나온 건가? ^^)
참 희한했다. 아마도 깜빡깜빡 잘하시는 할머님들께서 호박을 옆에 두고는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시다가 호박의 존재를 깜빡 잊고는 그냥 들어가셨나 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뒤이어 드는 생각.
내가 처음 본 상황이 아니었을 텐데 용케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일주일에 2번만 재활용을 버리도록 지정된 우리 아파트는 내가 나가서 분리배출하는 동안에도 여러 명의 이웃주민들이 재활용을 버리기 위해서 애호박 앞을 왔다 갔다 했다. 분리배출을 끝낸 내가 다시 돌아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아직 이 호박은 꼼짝 않고 그 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다.
치안이 허술한 나라는 메고 있는 가방도 도둑이 막 뺏어 달아난다던데
백주대낮에도 주차된 차의 창을 깨고는 차 안의 귀중품들을 훔쳐간다던데
흡사 '날 잡아가슈' 하고 있는 저 애호박은 혼자서 태평가를 부르는 것 마냥 여유로운 모습이 한가득이다.
혹시 이거 몰래카메라인가? 내일 아침까지도 아무도 안 가져가면 이곳 주민들께 애호박 하나씩 나눠드려요 이벤트인가~ 혼자 생각하며 풉 웃고 돌아섰다.
몰래카메라... 몰카라... 몰카 하면 이경규가 생각난다. 이경규 하면 양심냉장고가 생각이 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으로 그 당시 사진까지 찾아보는 나. ㅎㅎ
애호박 하나로 문득 어릴 적 TV에서 즐겨 보았던 <이경규가 간다>의 양심냉장고가 떠올랐다.
이경규가 진행하던 프로그램이었는데 8차선 도로쯤으로 보이는 넓은 차도에서 정지 신호가 켜졌을 때 정지선 앞의 모든 차들이 약속이나 한 듯 정지선을 밟지 않고 신호를 모두 잘 지키면 이경규가 짠~! 하고 나타나 해당 운전자에게 모두 양심냉장고 한 대씩을 주었던 아주 신박한 프로였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의 냉장고 가격도 비싸지만 7080 세대들이 기억하는 이 프로그램이라 하면 꽤 오래전 일인데 그 당시 냉장고를 한 두 대도 아니고 해당 운전자에게 모두 나눠 준다는 것은 거의 오프라 윈프리의 서프라이즈 선물 세례와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냉장고를 받은 운전자들은 뜻밖의 선물에 무척이나 행복해했지만 '성공~~~!!'을 외치던 이경규도 무척이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며 환호를 했던 것이 기억난다. 본인이 냉장고를 받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행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을까?
요새는 예전만큼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드물다. 용기가 없어서다. 그럼 왜 용기를 못 낼까? 용기를 냈다가 화를 당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 누가 위험에 처해 있어도 괜한 시선을 주지 않고 제 갈 길 가는 척하고, 길거리에 교복을 입은 중고등 학생들이 담배를 피워도 그러지 말라고 훈계하는 사람도 없다. 누군가가 잘못한 점을 분명 목격했음에도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마음으로 내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는 것에만 급급하다.
양심냉장고가 등장한 저 프로그램에서는 그러지 않는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정지선을 넘어간 차량에게 손짓을 하며 뒤로 가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를 하고 신호를 안 지키는 차량에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야유를 보낸다. 혼자서는 어려운데 다수가 모인 경우는 왠지 개개인에게 힘이 더 생기는 느낌이다.
쭈뼛쭈뼛 거리고 주저하며 해야 할 말을 안 하고 넘어가는 것보다 "No"를 외쳐야 하는 상황에서 주저 않고 다 같이 "N0"를 외치면 좀 더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우리 사회를 더욱 밝고 건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
음~
혼자 외로이 있던 애호박은 결국 주인이 찾아와 제 집에 잘 들어갔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