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관리사무소 방송이 흘러나온다.
"주민 여러분께 안내방송 드립니다. 우리 아파트는 8월 10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수도 점검으로 인하여 온수 공급이 되지 않을 예정입니다. 이점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마치 큰일이나 난 듯 남편에게 속보를 전하는 아나운서처럼 득달같이 알려주었다.
"여보, 여보! 온수가 안 나온대!"
"온수? 온수 안 나와도 뭐 문제 있어?"
"음... 그러네. 갓난쟁이가 있어서 매일 목욕시켜야 하는 것도 아니고, 몇 날 며칠 동안 온수가 안 나오는 게 아니라 낮시간 잠시 동안이니 큰 문제는 없겠네."
그래도 매번 아무렇지 않게 써왔던 것을 못 쓰게 되면 분명 불편한 일이 생길 텐데 하는 생각에 조금 신경이 쓰였다. 늘 편케 숨을 쉬고 살아오다가 갑자기 공기가 사라져서 숨쉬기 곤란한 위급 상황에 처한 것도 아닌데 항상 풍족하기에 소중함을 잊고 산 것에 대한 보복을 혹시 당하는 건 아닌지 하는 마음이 들어 개운치가 않았다.
온수 중단을 예고한 당일이 되었다.
"엄마! 수도꼭지를 오른쪽으로 틀면 물이 나오는데 왼쪽으로 돌리면 물이 안 나와~"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온 막둥이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일이니 놀라울 수밖에.
온수 공급이 중단되어 왼쪽으로 돌려야 나오는 온수 쪽은 물이 안 나오는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온수가 나오거나 말거나 나는 어머님의 무한리필 농작물인 파와 깻잎, 미나리를 씻는 중이다. 야채에 흙이 남지 않게 꼼꼼히 씻느라 내 손은 한참을 물 안에 담그고 있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 온수가 안 나와도 이렇게 불편함이 없다니.
만일 겨울이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아마도 욕쟁이 할머니로 빙의해 걸쭉한 욕을 하고 또 했을 것이다.
무슨 수도 점검을 한겨울에 하는 거야. 손 시려 죽겠네, 썩을 것들. 해가며 육두문자를 남발했을 텐데.
한여름이니 아무렇지 않다. 손이 시리기는커녕 물놀이 온 듯 마음이 평온하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고통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어느 정도 부를 이루어 꽤 살만한 사람이라면 잠깐의 중단으로 인한 불편쯤은 별로 타격이 없을 것이다. 아마 전혀 불편을 느끼지 못해서 '그런 일이 있었어?' 하고 오히려 되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그러든가 말든가 전혀 문제가 없다. 요샛말로 완전 럭키비키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악조건인 사람에게 그것도 모자라 추가로 중단이라는 불편을 준다면?
그 사람은 여태 애써 참아온 것도 무색하게 삶의 불편으로부터 시작된 고통이 도미노처럼 점차 가중되고 끝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나약하기만 한 인간의 삶이 좀 더 탄탄하면 좋겠다. 더불어 즐겁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무언가 삶에 훼방을 놓아 조금 불편해진다 해도 생에 전혀 타격이 느껴지지 않도록.
설사 타격이 심해 흔들릴 수밖에 없어도 무너지지 않고 툭 털고 일어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