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가지, 애호박, 박, 단호박, 노각, 깻잎, 양파, 마늘, 대파, 고구마순, 당귀, 미나리, 당근, 감자, 오이...
지금 냉장고 안에서 내 손만 바라보고 있는 메이드 인 어머님 야채들 목록이다.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하고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건조는 빨래건조기가 하고
방청소는 무선청소기가 한다고 해도
그 모든 것들의 조종은 사람이 해야 한다.
식기세척기, 세탁기는커녕 우물에 물 길어다 먹던 먼 옛날에 비하면 나의 이 투정은 배부른 소리긴 하다만...
냉장고 안의 것들은 더더군다나 방바닥에 붙은 내 엉덩이를 힘주어 떼내고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고 하나하나 꺼내 씻고 다듬고 썰고 요리해야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가정마다 로봇이 상시대기 중이라
호박전 해 놔~
했을 때 노릇한 호박전이 되어 있고,
깻잎무침 해 놔~
했을 때 짭조름한 깻잎무침이 되어 있고
노각무침 해 놔~
했을 때 아삭한 노각무침이 되어 있다면
정말 훌륭한 라이프일 텐데
내가 손수 모든 걸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너무 많은 재료는 재료가 아니었음을... 눈 깜짝할 사이 쓰레기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을...
호박전... 먹을 땐 참 고소하지.
만들 땐 또각또각 썰고 밀가루 묻히고 계란물 입혀 하나하나 팬에 부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깻잎무침... 먹을 땐 참 밥도둑이지.
하나하나 깨끗이 씻고 양념장 만들어 두 장 단위로 양념을 발라줘야 하는 귀찮음이 있지만.
노각무침... 먹을 땐 참 아삭하기도 하지.
얄팍하게 썰어 소금에 절인 후 팔이 부들거릴 정도로 물기를 꽉 짜줘야 하는 힘듦이 있지만.
집안일 누가 수월하다고 했는가.
해도 티 안 나고 안 하면 티가 왕창 나는데.
먹을 땐 더 하다. 한참을 서서 만드는 데 2시간씩 걸려도 먹는 건 10분 만에 끝나버리는 이 허무함...
하기 싫다, 하기 싫다 주야장천 노래를 불러댄대도
야채 저들이 스스로 걸어 나와 알아서 반찬으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기에
억지로 힘을 내서 반찬을 하는 수밖에.
에고고고. 얇지도 않은 내 허리 그만 똑 부러지겠네.
집안일은 언제쯤 끝이 나려나.
죽기 전에 끝은
택도 없겠지.
어머님... 내년 밭농사는 조금 줄여보시면 어떨까요?
야채들 모두 해결하느라 글 쓸 시간이 없네요. ^^;;
https://youtu.be/w3qYR34Ag-4?si=gWByi258ZfHXnR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