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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Oct 14. 2024

초파리, 짝을 잃다

초파리는 강렬한 사랑을 나누는 도중에 짝을 잃었다.


짝을 잃는 사태를 만든 장본인은 바로 나다.

장본인은 좋지 않은 경우에 쓰이는 단어인데 해충을 박멸한 것이니 나쁜 일을 한 것은 아니라서 장본인을 피해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초파리에게 매우 감정을 이입한 상태에서 쓰는 글이니 그냥 두기로 한다.




초파리가 겁도 없이 내 코앞을 알짱거리며 날아다닌다. 마술 할 때 잘 쓰이는 콧기름이 요놈들도 탐이 났나. 아무리 탐이 나도 그렇지 10월 중순에 초파리라니.

한여름 한철만 강한 인상을 주는 계절 스틸러가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흠뻑 느껴지는 10월에 어인 일인고.


어라, 근데 이것, 한 마리의 크기라고 하기엔 제법 크다. X파리의 아기인가. 아니, 내 시력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 두 마리로 겹쳐 보인다. 눈을 한 번 질끈 감고 다시 초점을 맞춰보니 아...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였다. 한 마리는 다른 한 마리 등에 어부바를 하고 있다. 사실 곤충이 사람처럼 어부바할 일이 어디 있겠나. 춘향에게 홀딱 반해버린 이몽룡이 사랑하는 춘향에게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하고 말하는 것처럼 편의상 어부바라고 하겠다.





이 두 놈(제대로 말하면 연놈이 되겠다만... 엇, 근데 다른 단어는 항상 남자가 앞서 오는데 유독 이 용어는 여자가 먼저 오네. 나쁜 것만 여자를 앞세우고 내원참) 이 사랑놀음을 내 눈앞에서 신나게 하며 날아다니더니 갑자기 둘은 분리되어 그중 하나가 몇 장 안 남은 휴지심을 향해 앉았다.

원래 이것들을 처리할 때면 맨손보다는 화장지가 반드시 필요한데 제 발로 걸어 들어간 화장지이니 참 편리하고나.

몇 장 안 남은 두루마리 화장지의 한 장 안쪽으로 이불을 덮듯 들어가길래 기회는 이때다 하고 난 이불을 더 꾸욱 덮어주었다. 사요나라...


그렇게 그놈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보내고 나니 내가 좀 잔인하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업고 놀면서 사랑을 나누던 커플이었는데 그중 하나를 멀고 먼 저쪽 세상으로 보내버리고 말았으니...


근데 사마귀의 경우에는 짝짓기를 하고 나서 배고픈 암컷이 금방 사랑을 나누었던 수컷을 씹어먹기도 하는데 크게 내가 뭐 잘못한 건가 싶기도 하고. 음... 사마귀는 자의적인 것이고 초파리 이것들은 타의에 의한 것이니 다른가.


그래, 그렇지. 둘이 사랑에 빠졌는데 주변의 반대가 있으면 왠지 더 격렬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처럼 그것들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나로 인해 어쩔 수 없는 헤어짐이었으니 더욱 애절하려나...




아차차... 그러고 보니 이불 덮고 조신하게 들어가 누워 제대로 신방을 차리려던 것을 내가 그만 명줄을 끊은 건가...


혼란하다 혼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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