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여름날 이야기 2

by 지금은

외양간의 소가 지그시 눈을 감았습니다. 꼬리를 휘둘러 모기와 파리를 쫓으며 편안히 앉아 되새김질할 때면, 마당 안 사립문 옆에는 어김없이 모깃불로 태우는 싱싱한 쑥 연기가 모락모락 하늘을 향해 오릅니다. 이미 땅거미가 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마당 멍석에는 밥상이 차려집니다. 긴긴 해가 짧기도 한 듯 어둠이 코앞에 다가와야 여름날의 하루가 마감됩니다. 지게를 등에 진 아버지가 등이 휘도록 꼴을 지고 황소처럼 돌아오고, 엄마는 머릿수건을 풀지도 못한 채로 바구니에 호미를 담고 종종걸음으로 암소처럼 달려옵니다. 말라비틀어진 오이를 구경도 못한 채, 동생은 집을 지키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안방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석고상처럼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책보자기를 등허리에 동여맨 채 달려와 아버지에게서 소를 빼앗았습니다. 큰 내로 향하는 길옆에서 오이를 하나 따서는 왼손에 쥐었습니다. 해거름이 왔다 갔다 하는 강변으로 나가 왜낫보다 더 날카로운 억새를 소가 사정없이 뜯어 삼키게 합니다. 오이를 몇 번이나 먹을까 하고 흘러가는 냇물에 씻었지만 망설이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오늘도 집안 식구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을지도 모를 동생 생각에 냇가에 엎드려 ‘후’하고 흩어 놓고는 제일 맛있는 물만을 골라 마셨습니다. 우리 집 암소의 배보다 내 배가 더 부르다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자꾸만 생기를 잃어가는 오이를 쳐다봅니다. 오늘도 집으로 돌아가면 분명 동생은 지루하고 따분한 여름 햇살을 피해 추녀 밑으로 깃들이는 그림자를 쫓아 방문 앞에 쪼그리고 잠이 들었겠다고 짐작합니다.

잘못 생각했나 봅니다. 급한 마음에 집을 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소를 사랑하지만, 그보다 동생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마음과 이미 동생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는지 모릅니다. 내일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동생을 뒤에 달고 소와 함께 이곳으로 와야 순서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흘러가는 물을 향해 얇고 매끄러운 조약돌을 던졌습니다. 살아 있지는 못해도 숨을 쉬지는 못해도 조약돌은 내 말을 잘 알아듣나 봅니다. ‘열탕’ 하며 던진 돌은 정말로 열 번이나 물 위 수면으로 내려앉았다 올랐다 하며 물총새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물수제비를 떴습니다. 이어 저편 큰 바위를 피해 모래밭으로 날아가 사뿐히 내려앉았습니다.

우리 집 암소 순이는 나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자유가 무엇인지는 어린 가슴에 알 턱이 없지만, 아버지의 일손을 벗어나 나의 손에 고삐가 쥐어지면 순이는 오늘의 일은 이것으로 끝났음을 아나 봅니다. 고삐를 사려 목에 걸어 주면 이내 내일을 위해 영양을 보충해야 함을 동생보다 더 잘 알아차립니다. 배가 불룩해지다 못해 양 옆구리가 곧 부풀어 터질 풍선 같습니다. 사립문의 기둥 사이에 몸통이 걸려 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 때까지 풀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무작정 나를 기다리게 하지는 않습니다. 해가 강변을 두어 번 왔다 갔다 하다가 마지못해 이별을 고하며 희미해 가는 빛 그림자를 남기면, 순이는 그제야 한 번 해를 향해 머리를 들어 슬며시 미소를 짓습니다. 그 뜨겁게 달구어졌던 자갈 덩이도 오늘은 조금 열기가 식었습니다. 달맞이꽃을 조금 흔들어 놓을 작은 바람이지만 느낌이 커서일까요? 며칠보다는 나아진 것 같습니다.

순이는 풀 뜯기를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고삐를 손에 쥐지 않아도 제집으로 가야 할 시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그냥 가도 될 것을 그래도 고삐를 스스로 내주어야 안심이 되나 봅니다.

오이에서 풍기던 상큼한 향이 이제는 순이의 되새김질 소리에 맞추어 사라져 버렸습니다. 바람 빠진 공만큼 생기를 잃었습니다. 돌아가 잠든 동생의 손에 오이를 살그머니 쥐어 주면, 엄마는 분명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이고, 저나 먹지. 동생 생각에 오이가 말라비틀어지는 것도 몰랐구나. 커서도 그렇게 동생 아끼며 살아야지.”

집에 돌아와서 잠든 동생을 억지로 마당에 뉘고 나서야 엄마가 종종걸음으로 돌아오시고 또 한참 후에야 아버지의 무거운 지게가 느릿느릿 사립문을 통과했습니다.

벌써 초승달은 동산 위를 지나 우리 집 변소 간 옆 오동나무 잎에 숨었고, 별들이 나타나 하나둘 무리를 지어 나의 눈동자 안에 머무르고 싶어 합니다. 이들은 내 마음을 잘 압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동생 옆에 나란히 누워 자신들을 헤아리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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