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기분 좋은 날 20210330
이달의 마지막 날이 다가옵니다. 나는 지금 공원의 호숫가를 걷는 중입니다. 어느덧 해가 길어지는가 싶었는데 오늘은 앞가슴과 등까지 따스합니다. 조끼의 목까지 올렸던 지퍼가 모르는 사이에 배꼽 부근까지 내려가 있습니다.
공원의 빈 벤치에는 햇살이 혼자 놀고 있습니다. 그 싸늘하던 기운은 사라지고 대신 온기가 나를 반갑게 대합니다. 전화기를 꺼냈습니다. 잠시 아껴두었던 안부를 물어야겠습니다.
“잘 계시지요. 잘 지내지?”
형수에게 건강을, 작은어머니께도 건강을, 사촌 동생에게는 안부를, 통화가 안 되는 또 다른 동생에게는 문자를 보냅니다.
그동안 전화를 하면 성공이 반이었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이니 통화를 시도한다고 때마다 즉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네 사람 중에 세 사람과 즉시 연락이 닿았다면 만족입니다. 문자를 보낸 동생에게서는 곧 소식을 전해오리라고 믿습니다.
궁금증이 풀어졌기 때문일까요. 하늘이 한층 푸르고 햇살이 더 고와 보입니다. 공원의 동산에는 개나리가 비탈을 따라 노란 띠를 둘렀습니다. 매화나무가 개나리 못지않게 흰 벽을 드리웠습니다. 목련은 주먹만큼이나 부풀어 오른 꽃잎을 터뜨립니다.
유모차에서 내린 아기가 방글거립니다. 나는 아기의 미소에 전염이 되었습니다. 마스크 속에 숨어있던 내 입꼬리가 올라가는 느낌이 듭니다. 아기에게 눈웃음을 쳤나 봅니다. 아기 엄마도 생긋 미소를 보입니다. 나는 손을 들어 흔들었습니다. 아기 엄마가 아기의 손을 들어 답례합니다.
몇 발짝을 옮기는데 전화벨이 울립니다. 형님의 전화입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보름이나 서로 안부를 묻지 못했습니다. 보름이라는 시간은 별것이 아니라 생각되지만, 지금의 경우는 다릅니다. 형님이 병원에 입원해 있기 때문입니다. 연인 사이처럼 하루에도 한두 번은 꼭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갑자기 통신이 두절되었습니다. 형님은 상대편이 전화하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손이 부자연스러우니, 자신이 먼저 통화를 시도해야만 합니다.
“왜 전화를 하지 않았습니까?”
“번호가 지워져서 그렇지 뭐.”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길게 나누었습니다. 움직이지 않던 왼쪽 다리가 굽혀진답니다. 반가움에 내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물리치료를 열심히 받은 보람이 있다고 칭찬했습니다. 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해 ‘파이팅’하고 손을 높이 들며 외쳤습니다. 일 년이 넘는 기간을 병원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희망을 품으면서도 때로는 좌절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면 뭐 하나.”
“조급해하지 말아요. 늦어도 집 앞의 감나무에 익어가는 홍시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고 하니 용기를 가지고 죽기 살기로 운동을 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삶은 의지입니다. 늘 좌절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다독이라고 말합니다. 요즈음은 이 말 저 말, 내가 철학자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목련이 지기까지는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형님이 내다보는 창가에 목련이 피었답니다. 글을 읽다 보니 목련이 피면 비가 온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와 나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나 봅니다. 목련을 두고 한 말입니다. 피는 꽃은 아름답지만, 지는 꽃은 쓸쓸하다고, 그렇습니다. 비 오는 날 지는 목련은 가엾습니다. 떨어진 꽃잎사귀는 시들 사이도 없이 사람들의 발길에 밟혀 짓무릅니다. 겨우 밟히지는 않는다 해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천덕꾸러기처럼 보입니다.
내일은 모레는 비가 오지 않는답니다. 과학에 의존하는 일기예보이니 믿고 싶습니다. 다음이 문제입니다. 주말에는 비가 내린다는군요. 기상예보관들이 기분 나빠하겠지만 어긋나기를 기대합니다.
‘가끔 빗나간 적도 있잖아요.’
항변 아닌 항변입니다.
월말은 아직 하루가 남았습니다. 내일은 소원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해볼까 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만남을 계속 미루어왔습니다. 미룸이 이어지다 보니 전화까지 미루어졌습니다. 눈앞에서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진다고 하더니만 틀린 말은 아닌가 합니다.
“잘 지내는 겨?”
“그럼, 죽지 않고 잘 지내지.”
“잘한 거야.”
“코로난가 입으론가 뭐 있지. 그놈이나 죽으라고 해.”
“알았구먼. 만나기는 해야 하는 디 말여.”
“봄바람이 아직은 남은 거 같으니까 좀 기다려 보자고.”
휴대전화를 검색합니다. 빠진 친구가 없는지 콕콕 짚어야 합니다.
아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어디예요?”
“밖이에요.”
“누가 밖인 줄 모르나.”
“나오기나 해요.”
혼자 집으로 들어가기가 뭣합니다. 아내와 봄 꽃놀이라도 해야겠습니다. 재빨리 건너편 빵집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걷는 재미도 있지만 먹는 재미를 덧붙이면 좋겠지요.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저녁노을까지 눈에 넣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