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021 그날

22. 빨래의 풍경 20210401

by 지금은

벚꽃이 수줍은 미소를 짓나했는데 어느새 얼굴을 활짝 드러냅니다. 올겨울은 예년에 비해 포근했던 때문일까요. 구십 년 만에 가장 빠른 개화라고 합니다. 이맘때쯤이면 나는 천사의 날개라도 단것처럼 친구들과 또는 혼자서 들도 산으로 쏘다녔습니다.


더 어렸을 때는 내가 오리 병아리라도 된 양, 함지박을 머리에 인 엄마의 뒤를 따라 개울로 갔습니다. 나는 할 일이 별로 없지만 아낙네들은 바쁩니다. 겨우내 묵은 동네를 씻어내야 합니다. 함지박에는 빨아야 할 집안 식구들의 옷가지며 이불 홑청이 들어있습니다. 오늘뿐만이 아닙니다. 눈이 녹아 졸졸 소리가 들려오는 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집마다 앞마당의 빨랫줄에는 빈틈없이 옷가지들이 매달립니다. 이불을 빠는 날이면 마당 한가운데를 가르는 흰 벽이 세워집니다. 빨랫줄이 길다 보니 바지랑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어제의 옷가지는 하늘을 날 듯 춤을 추었지만, 웬만큼 바람에도 별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렇듯 봄이면 느낄 수 있는 풍경에서 빨래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 도시나 시골이나 할 것 없이 세탁기가 빨래를 대신하니 연출이 아니라면 예전의 풍경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얼마 전입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중 좁은 골목에서 올려 보이는 파란 하늘과 함께 줄에 매달려 얌전을 떨고 있는 색색의 빨래를 보았습니다. 마당이 없어 주민들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줄을 연결해 빨래를 널었습니다. 도시에 살다 보니 한동안 보지 못했던 광경에 어린 시절 고향을 떠올렸습니다. 널어놓은 이불 사이를 비집고 숨바꼭질하던 모습입니다.


“그만두지 못해!”


엄마의 큰 소리에 움찔했습니다. 만일 이불 홑청이 바닥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함지박은 이들을 끌어안고 다시 개울로 가야 합니다.


세탁기와 냉장고의 출현은 주부들의 가사 활동에 숨통을 틔워 주었습니다. 시간을 벌어주고 힘을 비축하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제는 건조기까지 보편화되면서 손빨래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이뿐입니까. 어느새 젖지 않는 겉옷, 먼지나 더러움이 잘 타지 않는 옷들도 출현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떨까요. 일 년에 한 번쯤이면, 아니 영원히 세탁하지 않아도 되는 의류 용품들이 출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은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닌가 봅니다. 이와는 반대로 최근에는 환경운동이 꾸준히 전개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영화감독 스티븐 호수는 자신의 다큐멘터리 ‘자유의 빨래 걸기’에서 빨랫줄을 이용한 햇볕 건조를 장려하고 있습니다. 전기를 절약하고 옷감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계산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햇볕에 빨래 널기를 한다면 전 인류가 육조 원가량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이 사람의 이야기와는 관계없이 바람 부는 날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를 보면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내 옷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자신이 하늘을 나는 기분입니다. 그러기에 누군가는 하늘에서 춤을 추고 있는 빨래의 모습을 그리며 동시를 썼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집은 북향 바지라서 안타깝게도 빨래를 햇볕에 말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건조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주로 저녁에 세탁기를 돌립니다. 어둠이 깃들면 빨래는 건조기 대신에 거실과 각각의 빈 곳에 자리를 차지합니다. 마르는 동안 가습기 역할을 합니다.


오라! 공교롭게도 달력의 표지 그림 중, 김수근의 ‘빨래터’가 눈에 들어오는군요. 옛날 아낙들이 있는 빨래터로 달려가야겠습니다. 동네의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아직 차갑기는 하지만 흘러가는 개울물에 겨우내 찌든 내 마음도 떨쳐내야겠습니다.


멀리 고향마을의 빨래터를 향해 눈을 돌립니다.


“아니, 어느 녀석이 아직도 그림지도를 그린 거야?”


이웃집 할머니의 고함소리와 함께 빨래방망이가 젖은 이불홑청을 사정없이 두드립니다. 나는 깜짝 놀라 무작정 집을 향해 달음질쳤습니다. 엄마가 눈을 감아주기로 했지만 오늘은 아니어도 며칠 전에 그린 지도가 마음에 걸립니다.


숨이 가쁩니다. 방망이 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때립니다.


“빨래 날아가지 않도록 잘 지키고 있어야 한다.”


할머니는 바구니와 호미를 들었습니다. 봄을 캐 오시려나 봅니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몇 발자국 떨어져 뒤를 따릅니다. 사립문을 나서며 힐긋 뒤를 돌아봅니다.


집게발이 입을 앙 다문 채 눈짓을 합니다.


‘걱정할 것 없어. 너를 보고 한 말은 아닐 거야.’


그는 하늘로 치솟으려는 내 바지를 힘차게 물고 있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2021 그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