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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오월 Mar 04. 2023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 수필 ]

< 신천 징검다리 >


정신없이 보낸 1월과 달리 2월에는 만사가 다 귀찮고 뭘 해도 시큰둥해서 무기력한 채로 보내는 날들이 길게 이어졌습니다. 햇볕을 못 쬐어서 그런 것 같은데 막상 산책을 해도 기분이 나지 않고, 그토록 사랑하는 단골 카페들마저 가기 귀찮고 말이죠.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드는데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로 많은 시간을 보냈네요. 아깝습니다. 한 해 계획이 시작부터 삐끗해서 의욕이 다 사라진 건지, 오래 놀아서 노는 게 시큰둥해진 건지, 내추럴 본 게으름뱅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2000년에 만난 23년 지기 친구 말로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가 늘 나른해하고 틈만 나면 누웠다고 하니 세 번째 이유가 가장 유력하군요.


혈당이 높아서 관리가 필요하다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경고도 받았겠다, 체력이 좋아지면 의욕도 생기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달리기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일상에서 작으나마 무언가를 해내고 있다는 성취감이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하네요. 잘 달리는 게 아니라 꾸준히 달리는 게 중요하니까 기록에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달리기를 통해 어떤 결과를 얻어야겠다는 목표를 갖지 않고 달리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자고 말이죠. 몸은 따라주지 않는데 기록에만 욕심을 내다가 작심삼일이 된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릅니다. 원칙은 단 하나 일주일에 세 번. 달릴 때 컨디션에 따라 적당한 속도록 달리고 힘들면 걷고, 루트도 거리도 내키는 대로 기록을 재지 않고 달리고 있습니다. 좋네요.


나는 원래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 밤에 달려야, 뱀파이어 늑대인간 그런 거 아닌데 이상하게, 덜 힘든데 2월엔 아직 추워서 조금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습니다. 신천에 도달할 때까지 대로변에서 인파를 거슬러 달리며 민망함을 참고 나면, 신천변 산책로에서 본격적인 달리기를 하며 해넘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커다랗고 새하얀 석양 주변으로 주황색이 점차 번져가는 하늘이 신천 표면에 그대로 비쳐서, 수면 위아래에 두 개의 저녁놀이 펼쳐지는 풍경은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옵니다. 비릿한 물 냄새도 흐르는 물소리도 늘 좋네요. 기록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가끔은 멈춰서 사진을 찍습니다. 그것도 좋아요. 집을 나설 땐 후회하는 마음이 들만큼 추운 겨울날씨가 실제로 달리기에는 좋습니다. 달릴 때 땀이 덜 나고 습도가 낮아서 숨쉬기도 덜 힘들죠. 걸으면 추우니까 금방 다시 뛰게 됩니다.



‘운동’으로서 달리기를 처음 했던 때는 2019년 8월 15일. 푹푹 찌는 한여름이었죠. 친구가 러닝가이드 앱을 알려주고, 운동복을 골라주고, 저렴한 중국산 스마트워치를 선물해 주면서 옆구리를 쿡쿡 찔러서 시작했습니다. 서울의 직장에서 조금 일찍 퇴근하고 대구의 집으로 와서 가방을 놓고 입던 옷 그대로 운동화만 갈아 신고 나가 동네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친구는 분당에서, 나는 대구에서 동시에 앱을 실행하고 각자 달리기. 사실 그땐 친구가 좋은 뜻으로 권하는 거니까 달리는 시늉만 좀 하다가 도저히 못 하겠다면서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못 할 줄 알았으니까요.


나는 생각보다 잘 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맨 처음 기록은 20분 남짓, 대부분 걷고 조금 달려서 2.5km 정도였는데도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이게 바로 운동이구나 싶었습니다. 나에게 걷기는 운동이 아니라는 걸 달리고 나서 깨달았죠. 달리는 거리와 시간, 운동 횟수를 점점 늘여서 연말 즈음엔 7km 이상 연속 달리기에 워밍업, 컴다운까지 총 10km 이상의 거리를 한 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달릴 때마다 기록을 재면서 이전보다 시간이든 거리든 나아야 직성이 풀렸거든요. 그래서 금방 지쳤죠.


당시 서울에서의 주 4일 근무가 힘들어서 달리기 할 시간도 기운도 없다는 핑계로 몇 달을 쉬었습니다. 일을 그만두고 나서 다시 달리기를 다시 시작했는데 그 새 떨어진 체력 때문인지 한여름의 고온다습한 날씨에 마스크까지 써서 그런지 도무지 속도가 나지 않을뿐더러 자주 쉬어야 했습니다. 기록이 안 좋으니 재미가 없고 힘들기만 하더군요. 그래서 얼마 안 가 그만뒀죠. 이후에는 몇 달에 한 번씩 다시 시작했다가 그만두었다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만둘 때마다 의지가 박약한 데에 스스로 실망했는데, 문득 가끔이라도 달리는 게 아예 안 달리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게다가 달리기가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이미 실감했습니다. 목과 어깨의 통증이 뻐근함을 넘어서고 고관절이 삐거덕거리는 느낌이 들 때 달리기를 하면, 목도 어깨도 개운해지고 걷기도 편해집니다. 티브이에서 척추 전문가가 달릴 때 지면에 발이 닿으면서 받는 충격은 척추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걸 보면서 그래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죠. 정신건강에도 당연히 좋습니다. 흐르는 물길과 나란히 달리면서 하늘과 땅과 물이 대부분인 고즈넉한 풍경 속에 내가 있다는 걸 느끼는 것 자체로도 좋고,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달리기가 이렇게 좋은 운동입니다. 참 좋아요. 좋죠. 그런데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달리기가 왜, 어떻게 좋은지 얘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그만큼 달리기가 싫어서이기도 합니다. 좋은데 싫은 거죠. 힘드니까요. 숨이 차다 못해 가슴이 눌리는 것 같고 숨 쉴 때마다 목구멍은 찢어질 듯 아프고, 다리뿐 아니라 이런 데에도 근육이 있었나 싶게 온몸 여기저기가 뻐근하고. 아무리 많이 달려도 힘든 게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그저 잘 알고 있을 뿐이죠.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나가기 직전까지 달리기를 할 수 없는 이유를 찾다가, 별 게 없으면 싫은 마음을 억누르고 달리기 하러 나갑니다. 오늘도 이렇게 글을 쓰면서 달리기를 해야 하는 이유를 되새기고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고 있습니다.


매번 힘들게 나가지만 돌아올 때는 좋습니다. 조금 더 속도를 내 볼 걸, 조금 더 멀리 갔다 올 걸,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충분히 달렸다 싶어서 걷기로 마무리하다가 호흡이 안정되면 다시 달리고 싶어지기도 하고요. 그럴 때면 체력이 좋아졌나, 내가 더 건강해졌나 하면서 뿌듯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집에 돌아와서 씻고 나면 눕게 되네요. 한 시간 운동하고 나서 세 시간은 누워 있는 것 같습니다. 이틀 연속 달리면 다음날은 일어나기가 힘들고요. 운동을 해서 체력을 기르고, 체력으로 게으름을 벗어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운동을 하면 할수록 튼튼한 게으름뱅이가 되는 게 아닌지…….


고작 일주일에 세 번인데 이렇습니다. 아, 벌써 주 3회 원칙이 깨졌네요. 지난주에는 지키지 못했습니다. 억지로 노력해서 이틀 달렸네요. 그렇지만 이번 주에 4일을 달려서 보충하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벌 받는 것 같고 달리기가 더 싫어질 것 같아서,라고 핑계를 대겠습니다.


그래서 달리기가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그럴 수 있겠습니다. 제가 갈팡질팡하며 글을 썼죠. 실제로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해서 그렇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무엇에 대해서, 그게 내 마음일지라도, 단언하기가 어렵네요. 그렇지만 남은 평생 꾸준히 달리고 싶은 건 분명합니다. 아니,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달려야 한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네요. 시작했다가 포기했다가를 반복하면서, 온전히 열정만 있었던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내가 운동으로서 달리기를 한 거리가 1,000km 넘습니다. 전 세계 인구 중에서 이 정도의 달리기 기록을 가진 사람의 비율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니 조금 뿌듯해도 되겠습니다.

 

오늘도 달리기를 하고 왔습니다. 글을 쓰다가 창밖을 보니 해가 완전히 졌기에 바로 나갔죠. 기온이 제법 올라서 이제는 저녁시간 이후에 나갑니다. 아름다운 해넘이를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지난겨울에 신천변에서 뚝딱뚝딱 공사를 하더니 야간조명이 아주 예뻐져서 밤풍경도 못지않게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물에 씻은 고구마처럼 자주색으로 달아오른 얼굴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는 나의 몰골이 어둠에 감춰져서 다행이죠. 밤 기온이 영상 10도 전후가 되니 네오프랜 소재의 점퍼 안에 뜨거운 공기가 가득 찬 듯이 느껴지네요. 얼굴에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서 달렸는데 열기도, 흐르는 땀도 지난번에 비해 완연히 늘었고요. 조만간 더 얇은 운동복으로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앞으로는 2019년에 달리기를 처음 시작했던 때처럼 의욕적으로 달릴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꾸준히 달리기를 한다고 해서 기록이 점점 좋아질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집에 와서 눕지 않고 바로 앉아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다리가 좀 뻐근하고, 목과 어깨에 장착된 통증이 달리는 동안 사라졌다가 되돌아온 것 외에는 컨디션이 괜찮네요. 이번 주에는 오늘로써 세 번 달리기 목표를 달성했는데 내일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어쩌면 내일 달리고 싶어서 몸이 들썩이지 않을까, 김칫국 좀 마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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