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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오월 Oct 22. 2023

끝나지 않은 노래

[ 어중간한 소설 ] S#7. 2019년 11월, 어느 날

11월이 며칠 안 남았지만, 작업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아직 가을이다. 봄에 하얀 꽃가지를 창가에 드리웠던 이팝나무가 가을이 되니 노랗게 물들었다. 꽃이 피었던 자리에는 열매가 달려있는데 약간 길쭉하면서 둥그스름한 모양에 짙은 보라색으로 노란 잎과 대비되어 꽃만큼은 아니어도 예쁘다.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려다본다. 봄여름 내내 있는 줄도 몰랐던 대왕참나무들이 적갈색의 긴 코트를 입고 늠름하게 서 있다. 가을풍경에서는 단연 주인공이네. 이 거리에 대왕참나무가 이팝나무보다 많다는 걸 빨갛게, 노랗게 단풍이 들고 나서야 알게 되다니.


군데군데 늘어선 휘장의 움직임을 보니 바람이 적당히 부는 것 같다. 창문을 연다. 따뜻하게 보이던 공기가 냉랭해서 당황스럽지만, 곧 숨이 가뿐하고 머리가 개운해지는 기분이 든다.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나와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눈앞에 보이는 카페와 식당만 해도 대여섯 군데이고 소리가 울려서 정확히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좋은 계절이 다 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느껴보려는 사람들이 거리를 거닐고 있다. 한창일 때는 그냥 좋은 줄만 알다가 끝날 무렵에야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다. 가는 발걸음을 붙잡아 돌려세울 수만 있다면.        



     

작업실 한가운데의 넓은 책상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무슨 커피를 마실까 생각한다. 머릿속으로 어떤 원두가 있나 생각하면서 눈은 넓은 창에 그림처럼 담긴 풍경을 본다. 오늘따라 하늘은 짙푸르고 구름이 선명한데 이팝나무는 노랗게 물든 가지를 한쪽에 펼치고 있다. 창을 열고 손을 뻗으면 가지에 닿을 테니 조금 꺾어서 유리병에 담아볼까, 봄에 활짝 핀 꽃을 보고도 안 했던 생각을 한다. 아쉬워서겠지. 떠나려는 가을의 뒷덜미를 잡아 세울 수 없다면 가을의 작은 부분이라도 남겨두고 싶은 마음. 하지만 나는 아무리 사소해도 사회적 규범을 어기는 상황일 때 누군가 나를 보고 비난하고 있는 것 같아서 간이 콩알 만해 지는 타입이기 때문에, 가로수의 가지를 꺾음으로써 공공시설물을 훼손하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일어나서 창가로 가 거리를 내려다본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거니는 사람들이 제법 보인다. 다시 어떤 원두로 커피를 만들까 생각하면서 동시에 여기서 이렇게 창밖을 보면서 커피를 마실지, 밖에 나가서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실지 생각한다. 볕이 드는 곳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정도라면 밖에 앉아 있기 좋은 날씨다.


아침마다 산책하던, 집을 나가서 작업실로 돌아오는 일과는 언제부턴가 흐지부지되었다. 동네도 익숙해지고 이렇게 넓은 창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굳이 밖에 나갈 필요가 있나 하면서. 별거 아닌 매일의 작은 일과지만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처럼 의미를 부여하려는 마음마저 사라진 것이다. 집에 사다 놓는 원두의 종류와 간단하게 허기를 때울 수 있는 반 조리 식품들이 늘고 있다. 아침 산책뿐 아니라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귀찮아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까 봐 어떻게든 밖에 나가려고 주방에 살림살이도 먹을 것도 갖춰놓지 않으려고 했는데, 서울에서 이사 오면서 다 버렸는데 어느새 슬금슬금 사 모았네.  


겨울이 되면 더욱 활성화되는 부교감신경 때문에 꼼짝도 안 할 테니 날씨 좋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밖에 나가자, 좋은 계절 얼마 안 남았다, 그렇게 살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냐, 이렇게 들어앉아만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 고 깊숙이 가라앉아 있는 나를 설득한 끝에 나가기로 한다. 작업실 창밖으로는 안 보이지만 골목길 안쪽에 있는 작은 미술관 앞마당이 딱 좋겠다.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이 아쉽고 또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 원두는 집에 있는 것 중에 제일 좋은 걸로. 정확히 말하면 제일 비싼 거고, 커피 한 모금에 얼마인지 계산할 수 있을 정도로 비싸다. 파나마 게이샤. 두 단어 사이에 농장 이름이랑 또 뭐랑 말이 몇 개 더 들어가서 전체 이름이 매우 긴데, 어차피 나는 파나마의 맛과 게이샤의 맛을 느끼는 것도 버겁기 때문에 나머지는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추출도 정성껏은 하지만 자신이 없어서 이 맛이 맞는 맛인지 모르겠다. 근데 뭐, 밖에 앉아 마시는 커피는 날씨 반 커피 반이니까. 나중에 텀블러를 꼼꼼하게 씻을 걸 생각하면 벌써 귀찮은데 머그잔에 담아 들고나갈까, 잠깐 생각만 해도 창피함을 견디기 어렵다. 설거지를 귀찮게 하는 게 더 낫겠다고 금방 결론이 난다. 보온 기능은 없지만 내가 뜨개질해서 만든 예쁜 커버가 있는 텀블러에 담는다. 지금은 기능보다 예쁜 게 의미 있다.   


아무도 없는 미술관 앞마당 벤치에 혼자 앉아 가을풍경을 보며 커피를 마신다. 가끔 머리 위 나뭇가지에서 열매가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는데 그 소리가 제법 크게 골목을 울린다. 상수리나무다. 상수리나무가 맞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렇게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 나무가 상수리나무라는 걸 어떻게 알게 되었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기억의 페이지가 백지처럼 새하얗다. 근거가 없으니 이제 의심이 생긴다. 혹시나 하고 핸드폰으로 인터넷에서 상수리나무를 검색한다. 세상에 잎도 열매도 내가 알고 있는, 지금 내 머리 위에 있는 나무와 모양이 전혀 다르다. 몹시 당황스럽다. 도토리 모양의 열매, 교목, 가로수 등의 키워드로 검색해서 곧 진짜 이름을 알아낸다. 대왕참나무란다. 난생처음 듣는데. 상수리나무가 참나무과라니 대왕참나무와 가까운 친척 사이일까? 그렇다고 해도 둘이 같은 나무는 아니고 내가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던 거잖아. 혹시 내가 누구한테 이 나무가 상수리나무라며 아는 척한 적은 없었나……. 결국 대왕참나무의 둥글납작한 도토리처럼 생긴 열매에 머리를 몇 대 맞는다.


‘밖에 나오길 정말 잘했어.’


지금 같은 속도로 추워진다면 12월 초까지는 낮에 밖에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겠다. 서울에선 어림없는 일이지. 아직 이곳의 날씨가 익숙하지 않아서 일기예보를 확인할 때 서울과 이곳을 비교하며 짐작하고 있다. 이 정도 기온일 때 서울은 어땠고 여기는 그보다 2~3℃ 높으니 좀 더 따뜻하겠구나, 하는 식으로. 2~3℃ 차이가 뭐 다를까 싶겠지만 실질적으로 온도차가 꽤 느껴진다. 게다가 서울에서는 대로변의 고층 건물들이 만들어 내는 미세 기후 덕분에 체감되는 날씨가 실제보다 혹독하지 않았나.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11월이 끝나는 무렵 밖에 앉아 햇볕이 길바닥까지 내려와 닿는 걸 보고 있자니 감개가 무량할 지경이다.


모처럼 교감신경이 활성화된 것 같으니 산책을 할까. 동네를 벗어나서 큰길을 따라 걸어야겠다. 이 도시를 동서 방향으로 관통하면서 주변 도시들과도 연결되는, 사람의 몸에 비유하자면 척추와도 같은 도로가 근처를 지난다. 워낙 시가지가 작기 때문에 도시 내 주요 지역이 전부 이 도로에 매달려 있다. 서울로 치면 역사도심 내의 종로와 을지로, 강남도심 내의 테헤란로와 강남대로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다고 하면 되려나. 게다가 이 도시의 유일한 하천을 가로지른다. 그래서 대로임에도 불구하고 길을 따라 걷는 게 재미있다. 햇볕을 받고 싶을 땐 도로의 북측 인도에서, 피하고 싶을 땐 남측에서 걷는다.


미술관 앞의 좁은 골목길에서 작업실과 반대 방향으로 가다가 더 큰 골목길을 만나 따라가면 금방 대로변에 다다른다. 시청, 세무서, 고용지원센터, 도서관 등 우리 동네 밖의 어디든 가려면 시작은 항상 이 길을 따라 걷는 것이기 때문에 익숙하다. 왕복 10차선의 도로에 차들이 쌩쌩 달린다. 여기 사람들은 가끔 이 길이 엄청나게 막힌다고 하는데 그게 서울에서는 ‘길에 차 좀 있네.’ 하는 정도이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일렬로 서 있는 길에서 여름 볕과 달리 눈이 부시지 않고 따뜻하기만 한 햇볕을 쫓아 걷는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또 걷다가 횡단보도를 한 번 더 건넌다. 가로변에 있는 대형 건물들이 나란히 뒤로 물러서 배치된 구간이다. 누가 시켜서 그런 건 아니고 아마도 처음 어느 건물이 보행자를 위해 도로변 공간을 내주었고, 가로환경이 좋아지는 만큼 건물의 이미지가 더 좋아지는 걸 보고 이웃 건물도 동참하게 된 게 아닐지 추측하고 있다. 덕분에 폭 8m 정도의 보행 공간이 확보될 만큼 넓은 인도가 생기고, 인도의 한쪽에는 노란 은행나무 다른 한쪽에는 초록 양버즘나무가 각각 줄지어 서서 거대한 나무 터널을 만들고 있다. 봄여름과 다른 건 은행나무 쪽만 노랗게 물든 것뿐인데 이 길이 그 길인가 싶게 분위기가 다르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나무가 워낙 크다 보니 멀찍이서 카메라를 머리 위로 치켜들어야 구도가 괜찮다.  


‘이 풍경을 또 볼 수 있을까.’


해가 떠 있는 시간에 이렇게 햇볕을 받으며 걷는 일은 그냥 좋은 게 아니라 호사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행복.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백수생활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면 이 행복도 끝나겠지. 당장 내년 가을엔 어떨까, 평생 살면서 몇 번의 가을을 호사스럽게 보낼 수 있을까.


이제 골목 안으로 들어가 걷는다. 골목길이 격자 형태로 규칙적이고 필지도 네모반듯하게 열차 식으로 배열되었으니, 오래전에 구획정리사업을 했을 것이다. 저층의 주거지인데 카페와 식당 등 상업시설이 많이 들어와 있어 상권이 제법 크게 형성된 동네이다. 널찍하고 반듯한 골목길은 주거지역답게 차분해서 걷기 좋고 예쁜 가게들이 곳곳에 있어서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알록달록하게 단풍 든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한쪽에선 환경미화원이 연신 낙엽을 쓸어 모으고 있다. 나뭇가지에 달려 있으면 예쁨 받다가 땅에 떨어지면 쓰레기가 되는 게 문득 서글프다. 깔끔한 보도를 걸었으면 하는 엄마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굳이 쌓인 낙엽 위를 걸어가는 아이만 신났다. 엄마는 낙엽을 못 밟게 하려고 아이와 잡은 손을 계속 당기는데, 아이는 엉덩이를 뒤로 빼고 발을 뻗어 어떻게든 낙엽을 밟으려고 한다. 낙엽을 밟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데 엄마는 왜 못 밟게 하는지, 아이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커피를 마신 지 얼마 안 됐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이 동네의 단골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더 마셔야겠다. 넓은 전면 유리창으로 바깥 풍경이 시원하게 보이고 따뜻한 카페라떼가 아주 맛있는 카페가 있다. 집에서 바로 걸어오면 교차로를 두 번 건너는 신호 대기시간까지 포함해 이십 분쯤 걸리는데, 이 동네를 좋아해서 산책하러 가끔 온다. 그때마다 들르는 카페라 사장님이나 직원이나 나를 알아보는 것 같지만, 아는 척을 한 적은 없다. 오늘도 역시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따뜻한 카페라떼를 주문하고 제일 안쪽 자리에 앉는다. 아주 고운 우유 거품이 에스프레소와 섞여서 만들어지는 황금빛이 도는 갈색은 볼 때마다 황홀하다. 보이는 것만큼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오늘 찍은 사진 중에서 알록달록한 단풍이 두드러진 거리풍경 사진 몇 장을 골라, 핸드폰에 기본으로 설치된 사진편집 앱으로 보정하고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이제 바깥 풍경을 볼까, 하는데 서울에 사는 인친이 댓글을 썼다. 이렇게 멋진 곳에 사냐고 부럽다고. 회사 일로 만나서 사생활 얘기도 편하게 나눌 정도로 가까워진 그에게, 여기로 이사 오면서 인스타그램 계정을 알려줬더니 가끔 보는 것 같다. 여유 있게 사는 모습이 부럽다고, 지방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종종 그러는데 고3과 중3 자녀를 둔 어머니인 그분은 절대로 서울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커피를 다 마시고 잔이 빈 채로 카페에 앉아 있자니 마음이 불편하다. 커피 값이 저렴해서 더 그렇다. 3천5백 원짜리 커피를 마시면 어느 정도 앉아 있는 게 정당한 걸까. 커피를 테이크아웃해도 같은 가격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할까. 손님이 많을 경우와 적을 경우에 기준이 다른 게 합리적일까 언제나 동일한 게 합리적일까. 왜 나는 이렇게 답 없는 질문을 계속하는지 모르겠고 40분이면 충분히 앉아 있었던 것 같으니 일어나야겠다. 아, 물론 내가 카페에 앉아 있는 내내 빈자리가 여럿 남아 있었고, 만약 자리가 부족했다면 나는 커피를 다 마시고 바로 일어났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카페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밖으로 나간다.


대로를 따라 작업실을 향해 걷는다. 이파리에 초록색 엽록소가 사라지고 노랗게 빨갛게 단풍 든 나무들이 파란 가을하늘 따뜻한 볕 아래 참 예쁘다. 머지않아 잎을 다 떨구고 맨 가지로 추운 겨울을 맞이하겠지. 내 머리카락도 검정 색소를 다 쓰고 나면 단풍처럼 노랗게 빨갛게 물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흰색은 너무 처량하다. 그마저도 사실은 흰색이 아니라 투명한 거라네. 아무것도 없는 거라고. 어려 보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흰머리가 늘어나는 건 안타깝다. 흰머리가 아니어도 얼굴이나 목소리, 말투 같은 특징으로 나이를 가늠할 수 있지만 흰머리는 대놓고 가슴팍에 나이를 크게 써 붙인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게 어려 보이고 싶은 거 아니냐고 할 수 있겠다. 지금 나이보다 몇 살 더 어려 봤자 그 나이도 많은데 무슨 의미가 있나.


몇 살로 보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나이 그 자체이지. 나이가 숫자일 뿐이라는 말은 명제가 아니라 바람이다. 내가 열 살쯤 아래였더라면 이 도시에서 또래 친구를 사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자주 다니는 가게 사장님이나 직원들하고도 손님 이상으로 친분을 쌓았겠지. 카페에서 일해볼 기회도 있었을 거다. 어린 사람들한테는 커피 만드는 일에 대해 경험이 없고 잘 몰라도 같이 일하면서 배우면 된다며 같이 일하자고 하는데, 바리스타1급 자격증이 있고 핸드드립 고급과정 교육과 바리스타 실무 교육을 받은 나이 많은 나한테는 그런 제안을 하지 않는다. 단골 카페도 그렇고 심지어 교육받았던 카페도 그랬다.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의지를 보여야지, 하는 말은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는 걸 전제로 한다. 나는 그저 이해한다. 나이는 많은데 숙련되지 못한 내가 가게 입장에서도 손님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은걸.     


작업실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데 인스타그램 알림이 뜬다. 누군가 내가 좀 전에 올렸던 카페 사진에 댓글을 달았다기에 바로 확인한다. 공손하게 표현했지만, 내가 너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고 팔로우했으니, 너도 그렇게 해라, 뭐 그런 내용이다. 그 계정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 많은 카페의 사진이 있고 모두 멋지다. 거의 다 이 도시에 있는 카페들인 걸 보니 여기 사람인 것 같고 그 카페의 단골인 것 같다. 지금까지는 내가 모르는 사람의 댓글에 반응하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망설임 없이 그 사람의 댓글에 정성스레 답을 하고 팔로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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