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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생끝에골병난다 Jun 19. 2023

왜 우리는 걸그룹을 사랑할까. '걸그룹의 사회학'

뉴진스의 변증법과 한국적 현대성.

<왜 우리는 걸그룹을 사랑할까. '걸그룹의 사회학.'>



입대한 뒤 평생 본 것보다 많은 걸그룹 뮤비를 시청 당하는 중이다. 심각한 문화지체현상 인간인 내 기억 속 마지막 아이돌은 에이핑크와 엑소였다. SM의 광야적인 사운드는 음악으로 들리지 않았다. 군대에서 밥 먹고 걸그룹 뮤비만 보니 이젠 4세대 아이돌로 글을 쓸 지경이 됐다.


트와이스나 레드벨벳이 활동하던 시절엔 그닥 팬인 적이 없었는데, 지금 그 노래들을 들으면 이상한 향수가 생긴다. 중학교에 다닐 때, 어디를 가든 트와이스 <TT>를 틀어줬다. 7년이 지나 그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다. 꿈 속에서 나는 늘 중학생인데, 눈 떠보면 황당하게 자란 몸을 지닌 채로 군대 막사에 갇혀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방금은 윈터랑 카리나가 점점 태연으로 수렴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브의 안유진은, 안유진은,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안유진이라는 탁월함이 있어 강호의 균형이 맞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소녀시대에서 아이브로, 여성상의 전환


3세대 아이돌까지만 해도 걸그룹의 노랫말은 로맨스를 소재로 한 것이 많았는데, 어느샌가 추세가 바뀌었다. 사랑 노래의 시대가 끝나고 '자존감 타령'의 시대다. '자기애'를 중점에 둔 연출의 아이브와 르세라핌. 뱀을 사냥하는 에스파 등이 대표적이다. 사랑스러움이나 섹시함으로 남성에게 '플러팅'하는 여성상이 아닌, 여자 팬들이 동경하는 강인한 자아의 여성상이 전면에 등장했다. 2010년대 중후반 정점에 달한 1020 여성들의 온라인 페미니즘 운동이 있기 전, 'oh oh oh 오빠를 사랑해'라고 노래하던 소녀시대의 <oh!>, 걸스데이의 <darling> 등은 모두 객체로서의 여성을 구현했다. 최근 걸그룹 노래의 경향성은 여성상이 객체에서 주체로서의 전환되는 과정임을 상징한다.

걸크러시 느낌의 걸그룹이 다수인데 다시 소녀성을 상품화한 뉴진스는 시장의 혁신자인 동시에 반동이기도 하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문화 산업의 유행은 원래 변증법적이기도 다. 진보적 변혁이 있다가도, 본성을 자극하는 한 번의 반작용이 순식간에 돌아온다. 원 상태로 회귀 것 같아도, 세상이 마냥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여성이 주체로 등장했던 경험이 모두의 무의식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안유진 최고. 출처: tvn

성장과 성숙의 차이점


여성 청자를 염두에 둔 걸그룹 음악이 보편화됐지만, 여전히 많은 남성들이 걸그룹을 소비한다. 여성주의를 경계하면서 걸그룹 릴스에 빠져사는 남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를 테면 군대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치자. 존재하는 모든 뮤직비디오를 틀어놓고 매일 품평을 매기는 남자. 화면 속 여자들은 나를 지적하지 않는다. 성차별에 분노하지도, 나와 경쟁하지도 않는다. 그저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현현인, 선물 꾸러미일 뿐이다. 상품화된 여성성의 첨단. 젊음의 찬미. 그런데 대화를 나눠보면 사실 그는 여자를 무서워한다.


무지는 공포로 이어지고, 공포는 곧 혐오로 이어진다. 예시를 들어보겠다. 우리는 예전처럼 코로나19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백신을 맞았거나 항체를 보유했다면 중증으로 이어질 확률이 현저히 적어진다. 기저질환자와 노인의 경우를 제외하면 코로나19는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다. 처음 코로나가 유입됐을 때, 전염병에 대한 무지 때문에 우리는 공포에 떨었다. 이 공포는 곧장 외국인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다. 방역 효과가 미미하다고 밝혀진 특정 국적자에 대한 입국 금지 요구를 정치권에서까지 공공연히 들먹였다.


남성 사회에서 여성은 사회적 성취를 증명하는 트로피로 기능한다. 그 트로피는 나와 다르게 생각하기에 행동을 예측할 수 없으며, 심지어 나를 거부할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공포와 혐오, 핵개인 시대의 많은 남자 아이들이 여자에게 그런 반응을 보인다. 성인이 된 소년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배풀던 부모의 품을 떠났다. 홀로 남겨져 사랑을 나눌 누군가를 찾지만, 그녀는 다른 가족의 아래서 자란 '남'이다. 사랑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사랑이라는 구원을 얻기 위해선 감내해야할 고통이 있다.


성장은 상실의 연속이다  부모도, 연인도, 아이도 떠나간다. 성장에만 그치는 사람은 우울하다. 성숙은 껍질을 깨어 타인을 받아들이고 자아를 조정하는 과정이다. 불일치하기에 슬프고, 눈동자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기에 불안한 존재로서의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성숙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 여성은 사람이 아니라 대화할 수 없는 '영원한 타자'일 뿐이다. 그는 '여자어'를 쓰는 '불편러'들을 이해하는 대신 이상화하거나 경멸한다. 그는 성장했지만 성숙하지 못했고, 여전히 여자가 무섭다.

그는 현실의 여자보다 저 영상 속의 그녀들을 탐닉할 것이다. 그건 아무 위험도 아픔도 없는 일일 것이다. 그가 욕망하는 화면 속의 여성은 여자가 아니다. 그건 모니터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이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꿈을 이룰 수 없었으며 현실마저 놓쳐버린 이들에게, 모니터 속 아름다운 소녀는 현실의 도피처이자 꿈이다.




우리가 장원영처럼 될 수 없다면


4세대 걸그룹의 특징은 여성 소비자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남성 그룹 멤버들의 잦은 구설수 탓에 걸그룹 팬으로 '갈아탔다'는 이야기가 통상적인 설명이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유행하는 문화에는 시대의 경향이 담겨있다. 세상의 눈높이가 솟아올랐다. 청년에게 제시되는 이상과, 요구되는 허들이 높아지고 있다. 푸코의 말처럼, 이제 권력은 강압하는 대신 대중의 내면으로 침입하여 작동한다. 처음에는 기업 착취에 동원하기 위한 '자기계발' 요구에 저항하는 '88만원 세대' 같은 담론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완벽히 지배 질서를 내면화한 우리는 '미라클 모닝', '갓생 인증'에 만족한다. 성역할과 인간 해방 운동에 대한 반작용은, 폭력의 형태를 띄기도 하지만 우리의 내면에 스며들어 구심력의 욕망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한국적 현대성이라는 게 존재한다. 현대인의 정신 상태는 반복되는 소멸과, 소멸에 대한 공포로 이루어져 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소비하라고 독촉한다. 이것을 마시고, 이것을 배우고, 이것을 즐겨봐야 한다. 그 와중에 영속하는 것은 없다. 그런 우리는 살아있는 것들, 영속하는 것들로 도시를 채운다. 무덤을 교외의 산 속으로 치워버린다. 죽음을 잊은 우리는 죽지 않을 것처럼 아둥바둥 살아간다. 자연을 그리워하면서 강박적으로 벌레를 잡는다. 공원에서는 밤마다 벌레 타는 소리가 들린다. 낡은 골목을 부수고 변하지 않을 것으로 믿어지는 철근과 콘크리트를 깐다. 자연과 가난을 추방하고 아파트를 세운다. 어둠을 박멸하려 늘 새하얀 형광등을 켜고 산다.

우리의 도시는 언제나 젊고 영원할 것들만 가득해야 한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그게 될 리 없다. 다들 알다시피 시간이 흐른다. 사람은 늙고 사랑한 것들은 퇴락한다. 사랑 그 자체도 머지 않아 넘어질 것이다. 김상욱 교수는 우주의 본질이 어둠이라고 했다. 우리는 하얀 형광등을 켜고 어둠이 박멸된 세상을 만들려 하지만, 현실의 우주에서는 광활한 어둠을 가녀린 빛이 달릴 뿐이다. 세상 모든 것이 낡는다. 그걸 인정하지 않을수록, 강박적으로 어리고 밝은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쓸 수록 불행해진다. 낡은 집에서 빈둥대며 사는 심심한 나라의 사람들이 우리보다 행복한 것은 우연이 아니며,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자살하는 것도 운명이 아니다. 우리는 더 너그럽고 느긋하게 살아갈 수 있다.


언젠가 외국 토크쇼 진행자의 질문이 논란이 된 적 있다. 그는 K팝의 착취성, 젊음에 대한 찬미를 비판했다. BTS RM의 현명한 답도 화제가 되었다. 그는 서구의 번영과 여유 이면에는 식민지배와 착취가 있었다고 말했다. RM의 대답은 유의미하고 재치있었다. K팝 아티스트 당사자를 앞에 앉혀두고 그런 질문을 던지는 건 무례한 일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이 우리의 영역에서 부조리를 해결할 책임을 회피하는 논리로 쓰이는 에 그쳐서는 안 된다. 표준으로 군림하고 착취하는 서구의 기만을 비판하되, 우리의 영역에서 문제를 성찰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함께해야 한다. 젊음에 대한 찬미는 젊지 않은 모든 것을 우울하게 만든다. 젊음에 대한 강박은 청년들조차 스스로를 검열하게 한다.


스토아 학파의 행복

자기결정성 이론에 따르면 연결감, 자율성, 유능감, 이 세 가지가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고, 내 행동을 내가 결정할 수 있으며, 일을 하며 나날이 실력이 나아지는 유능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반면 비교와 질시는 충분히 멋진 사람조차도 불행으로 이끈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긍정하는 대신, 부끄럽게 여기며 여전히 '노오력' 한다. 몸을 키우려 약물을 먹고, 수영복을 입으려 지방흡입술을 받는다. 또다시 누군가 도태된다. 아이돌을 부러워하되 열등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들도 각자의 분야에서 자기 역할을 할 뿐이다. 나도 적당한 빈틈을 찾아 살아가면 된다. 그게 가장 위대한 분야가 아니면 어떤가. 그저 그 일이 나에게 즐겁고, 내가 연결감과 유능감, 자율성을 느끼면 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학파는 세속적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정신적 수양을 강조했다. 그래서 흔히 '금욕주의'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모든 본능을 억압하는'금욕'은 아니었다. 그들이 말하는 금욕이란 '내 것이 아닌 것을 욕망하지 말라는 금욕'이다. 남들을 따라 하느라 자신을 괴롭히지 말고 부질없는 욕망들을 놓아주라는 의미다. 모든 분야에서 남보다 앞설 수 없다. 차은우나 장원영처럼 외모가 출중한 사람, 일론 머스크처럼 돈이 많은 사람이 부러울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부럽다는 이유로 내 인생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뒤늦게 코인을 구매한 뒤 매시간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며 전전긍긍하거나, 성형수술을 위해 돈을 모으는 인생은 불행할 뿐 아니라 만족스러운 결말이 기다리고 있지도 않다. 심지어는 조금 추해보인다. 자신의 삶을 나만표준으로 움켜쥘 때, 은은하게 새어나오는 멋이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스스로를 덜 괴롭히는 것. 수천년을 이어진 '갓생'의 가장 쉬운 공식이다.


물론 그런 태도를 용인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소설가 아밀은 문학잡지 <릿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여자 아이돌은 ‘마르고 예쁘고 무해한 여자’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고 예쁘고 강인한 여자’를 재현해 보여야 하는 것이다.”


살도 가난도 없는 아이돌의 '안티프래자일'함은 그렇게 유지된다. 한겨레21의 익명 기사는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어리고 완벽한 여성 청년에게 조금의 티끌조차 견딜 수 없는 이 시대는 너무나 '프래자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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