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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쁨 Apr 04. 2022

나는 정말로 살고 싶었어. 붙잡아 주길 바랐어.

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 7


그 시절의 나는 정말 살고 싶지 않았다. 죽지 않는 이유는 그저 죽지 않기 때문이었다. 살아있는 이유도 그냥, 살아 있으니까. 좋아하는 일이나 사람이 없던 건 아니지만 그게 삶의 이유까지 되진 않았다.



언제부터 죽고 싶었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어 일기장을 열어보았다. 더 어릴 때 썼던 일기는 없어져서 찾지 못했지만, 최소한 중학교 때부턴 죽고 싶었던 모양이다.


왜 죽고 싶었을까?


생각해보니 굳이 죽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냥 나는 내게 주어진 시련을 버티기 힘들었고, 벗어나는 방법이 죽음뿐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나리라 생각했다. 차라리 죽는 게 편해지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세상은 내 생각보다 살기 좋은데, 나는 몰랐다. 왕따 후유증으로 교우관계는 항상 불편했고, 집에 돌아오면 부모님과의 불화를 거의 매일 경험했다.


내가 살고 있던 그 좁은 우물만 벗어나면 세상은 정말 살 만 한데, 나는 그 좁은 세상에 갇혀 그저 죽기만을 바랐다.


사실 난 죽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너무 살고 싶었는데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 자신을 혐오하고 내 세상을 비관하며 삶의 의욕을 상실해갔다.


난 정말 “죽고” 싶었던 게 아닌데.







언젠가 그런 글을 봤다. 신발을 벗어 두고 투신하거나, 죽기 전 문자 메시지 등으로 작별을 알리는 사람은 마지막으로 잡아달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거라는 글. 그 글이 이상하게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항상 죽고 싶었지만, 누군가 붙잡아주기를 바랐던 거구나. 그 글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죽을 만큼 괴롭고, 죽고 싶은 생각도 들고, 내가 왜 태어났는가 하는 생각도 들고, 정말 죽고 싶지만, 누구든 내게 죽지 말라고, 나한테 기대 울라고, 내가 잡아주겠다고, 그 한 마디만 해주면 난 버틸 수 있다.


물론 가족들에게 내 마음을 전혀 터놓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저 그때의 가족들은 내 마음까지 고려해주기엔 여유가 없었던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차라리 편하다.


이해를 하는 것과 별개로 그땐 정말 단 한 명이라도 의지하고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다. 그런 사람이 있었더라면 지금까지 과거의 일을 꺼내는 것이 괴로워하진 않았을 거란 생각은 한다.





지금의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오히려 살고 싶다. 가능한 건강하게 누릴 건 누리면서 살고 싶다. 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고, 내가 겪었던 경제적, 심리적 고통을 약자들이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내가 너무 불쌍하다. 지금 나의 무의식 속에 갇혀 있을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너무 불쌍하다.


속을 비울 방법을 알지 못해 항상 울기만 했던 나. 자해를 하던 나. 삶의 행복을 느끼지 못하던 나. 죽고 싶어 하던 나.


그때의 나를 위로하기 위해선 내가 더 강해져야만 한다. 내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또 이겨내야 한다. 아직도 그 시절만 떠올리면 눈물부터 나는 내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이자 위로이다.


우리 죽지 말자.


행복하게 살아보자.


어른이 된 나는 내 안의 어린 나를 다독이며 트라우마와 싸운다.


아직은 쉽지 않지만. 아직은 그래도 눈물이 먼저 나지만. 그래도 언젠가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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