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9번 교향곡 3악장에 대하여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은 베토벤 최후의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그 후 피아노 소나타나 현악사중주 도 몇 곡 있지만. 대편성에서는 마무리를 한 샘이었지요. 이 9번 교향곡을 좋아하게 된 동기는 꿈결에서 들려왔던 합창 부분이 끌려서였지요. 그래서 합창’을 들을 때면 너무 길어서 1,2악장을 듣다가 3악장의 지루함을 건너뛰고 4악장 합창 부분을 듣고 마무리했던 적이 더러 있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초보자의 무지였다고 생각됩니다.
이 3악장은 다른 악장들과는 성격이 완전 다른 느낌이었다는 것도 작용했던 거 같아요. 이질감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런 류의 3악장의 거의 전체를 채우는 선율은 베토벤 특유의 선율로 이미 각 교향곡에 찔끔~들어가 있는 선율인데, 그 선율을 마침내 느끼고 알게 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4번에 짧게, 5번의 2악장에서 파도치듯이 나타나고, 6번의 5악장에서도 나타나는 이런 선율은 9번 3악장에서 총집결되어 한 악장의 전체가 이런 선율로 가득 차있다는 겁니다.
각 교향곡에서 맛보기로 짤막하게 감 칠 나듯 선을 보이다가 다 모아서 이 3악장에서 한 악장으로 시원하게 다 드러내어 주면서 베토벤은 스스로도 환희를 감추지 못해 춤을 추듯 발걸음을 교차시키면서 바꾸고 또는 걸어가다가 가끔 춤도 추기도 하는 그런 기분을 나타내는 이 3악장은 또 평소에 악기의 한계에 부딪혀 안타까워하다가 개량된 악기가 나타나 너무 만족해서 악보에 옮겨 놓았는데 그것도 이 3악장에다 넣어놓았지요. 어떤 전문 평론가는 이 부분을 베토벤의 혼에 대한 사랑이 지극해서였다고 설명하는데 물론 혼에 대한 사랑도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보다 우선하는 것은 베토벤의 악기에 대한 목마름에서 나타나는 결과가 잘 표현되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3악장의 거의 중간부에 나오는데, 클라리넷, 오보에, 바순과 혼의 3대 1 대결에서 혼이 승리를 하는 구절을 만드는데 혼이 4대 이상 있었겠지만 그 당시 피스톤을 사용한 혼은 단 한대뿐이었기 때문이었어요. 그 혼을 발전시켜 클래식 혼 대신에 이 피스톤 혼을 사용하는 그 주자를 위해 이 부분을 삽입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의 승리로 베토벤은 적어도 한 악기에 대한 발전을 이루어내었다는데 만족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베토벤의 악기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하려고 노력한 지휘자는 고악기를 사용 연주했던 호그우드도, 노링턴도 아니었지요. 바로 아르농쿠르였는데, 다른 지휘자들은 고악기로 그 당시의 악기상태와
현상을 나타내어 재현하는데 중점을 두었지만 아르농쿠르는 베토벤의 악기에 대한 목마름이 잘 해소된 현대의 악기로 그 당시의 주법을 역으로 재현해 내어 베토벤이 이루고자 했던 갈증을 해소시키려고 노력했다는 겁니다.(텔덱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아르농쿠르 지휘-그라모폰상 수상, 92년 국내 초기 수입분 전량매진)
그 혼이 성공하고 난 후, 환희에 도취되어 덩실덩실 춤을 추는 대목이 나타나는데, 그 부분을 듣는 본인도 같은 기분이 들어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아래 악보로 예측됨. 음악전공이 아니라 정확한 것인지는 모름)
결국 합창 교향곡은 이 3악장 때문에 최고의 걸작이 되었으며, 다른 악장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나, 미운오리새끼가 백조가 되어버린 격이었지요.
본인은 이 3악장을 누구보다도 더 느리게 연주하여 합창 부분에서 더욱더 환희에 찬 송가를 만들어내는 번스타인의 지휘가 적어도 저에게는 결론이라고 생각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