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공 May 19. 2022

취업준비생으로 살아남기 04-취준생의 사회공헌

백수도 사회에 보탬이 되고 싶다

종교는 없지만 양가 모두 기독교 집안. 모태신앙이자 무신론자. 

여름 성경학교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지옥 체험은 내게 말 그대로 지옥 같은 트라우마를 안겨주었고, 2박 3일 일정에서 탈주하여 먼저 집에 온 이후로 교회에 가지 않았다. 그런 내가 지금은 기독교 단체에서 진행하는 봉사에 참여하고 있다. 봉사를 하며 처음으로 마음을 쓰고 사랑을 느낀다. 




내 인생에 봉사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중고등학교 때 의무적으로 봉사 실적을 채워야 했기에 다양한 활동을 했다. 심폐소생술 수업을 듣고 추운 겨울 지하철 역사에 서서 안내를 하기도 했더랬다. 지나고 보면 남는 것 없이 휘발되는 기억이 아쉬웠다. 거창하진 않더라도 마음이 가는 봉사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봉사는 편지 번역 봉사이다. 생활이 어려운 어린이와 그들을 돕는 후원자 사이에 편지가 오고 간다. 어린이가 영어로 쓴 편지를 번역하여 한국인 후원자에게 전하는 것이 나의 임무다. 일면식 없는 그들이 서로 나누는 것은 사랑, 사랑이다. 후원자는 어린이가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쓰고 아이는 감사로 보답한다. 서로의 일상과 건강을 궁금해하고 고심히 고른 성경 구절을 보낸다. 안녕을 빌며 마음을 주고받는 과정에 내가 서 있다. 그 애정이 깨지지 않도록 조심히 한 구절씩 언어를 옮겨 본다. 


번역을 할 때면 정확한 뜻과 자연스러운 문장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자비 없는 필기체에 당황할 때도 있다. 날려쓴 알파벳을 해독하기 위해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거나 다른 번역 봉사자들에게 SOS를 친다.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번역 하지만, 선배 번역 봉사자의 의견으로 번역이 수정될 때가 있다. 알림이 떠 있을 때면 순간 철렁하지만 역시 납득이 가는 수정이다. 오탈자나 지나친 오역이 문제일 때도 있지만 가장 자주 수정되는 부분은 문체다. 최대한 어린이의 말투로 자연스럽게 번역하는 것이 관건! 나도 모르게 k-유교걸 자아가 튀어나와 너무나 공손해진 것이 문제였다. 후원받는 입장이라고 지나치게 공손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그저 그들의 사랑을 오롯이 전해주면 그만이다.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후원자는 후원자답게. 


편지에 쓰인 영어의 난이도는 높지 않지만 기독교 단체에서 주관되는 만큼 생소한 용어를 만난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모태신앙이자 거실 가운데에 걸린 십자가가 익숙한 무신론자다. 어린 시절 교회에 다니던 짬(?)이 이럴 때 발휘되는구나. 신기하고 묘했다. 영어로 쓰인 주 예수 그리스도, 전능하신 하나님, 샬롬까지 보자마자 자동으로 번역이 되었다. 지옥 체험 이후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서로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바라며 기도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취업을 준비하며 마음 뉘일 곳이 필요했다. 자연히 교회나 성당을 떠올렸지만 주기적으로 방문하여 기도할 자신이 없었다. 일단은 그들이 나누는 애정을 잠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위로가 된다. 




100%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하느냐 묻는다면... 멋쩍게 웃는다. 봉사도 스펙인 마당에 진실된 마음으로 봉사한다며 봉사시간을 거절할 여유는 없다. 매달 착실히 VMS 사이트에 들러 봉사 시간을 인증받는다. 그렇지만 사원증을 건 모든 사람을 부러워하며 스펙 생각뿐인 시기에 다른 이를 위해 기꺼이 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은 내 하루에 윤기를 더해준다. 따스한 누군가가 내가 옮긴 편지를 보고 행복하길 바라며, 오늘도 뚫어지게 필기체를 분석한다. 










작가의 이전글 취업준비생으로 살아남기 03-취준생의 정신수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