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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May 23. 2023

그 여름의 하모니카



여름방학이다.

사택 벽에 기대어 상호 형이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광산에는 고등학교가 없어서 무조건 읍내에서 자취를 하거나, 여유 있는 집은 하숙을 시켰다. 자취하던 상호형은 토요일과 방학 때만 집으로 왔다. 엘리트 교복과 까만 모자에 달린 금빛의 한문'高'가 너무너무 멋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인데 몰래 담배를 피우다 들켜서 정말 다리몽둥이가 부러질 정도로 맞았지만, 여전히 형의 옆에만 가도 아버지 냄새가 났다. 엄마는 항상 상호 놈 근처에는 가지도 말고 유행가 부르면 혼날 줄 알라는 협박을 잊지 않았다.

하모니카 소리가 좋아서 형 앞에 턱을 괴고 한참을 쳐다봤다. 입으로 부는 작은 풍금 같았다.

"야! 너 담배 하나만 사와라. 남는 건 쫀득이

사 먹어. 내가 가면 점방에서 안 팔아서 그래."

상호형이 은밀히 꼬드겼다.

"형! 나 하모니카 가르쳐 주면 쫀드기 안 사줘도 심부름할게."

흔쾌히 승낙했고 거래가 성사되었다.

어른들한테 혼날까 봐 가제 잡아 구워 먹던 산으로 올라갔다.

내려다보이는 까만 신작로엔 동발을 실은 제무시 한 대가 빌빌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아이들 몇 명이 제무시 뒤꽁무니에 매달려 뿜어져 나오는 매연냄새를  맡고 있었다.

한여름이지만 워낙 높은 곳에 위치한 광산은 산에만 올라와도 시원했다. 상수리나무그늘 아래서 상호형의 개인 교습이 시작됐다.

"야! 이거 별거 없다. 음계 몰라도 형이 가르쳐 주는 데로 하면 방학 끝날 때까지 동요는 다 연주할 수 있어. 멜로디만 알면 돼. 어느 위치에서 어떤 음이 나는지 그것만 기억해."

애국가만 배우면 어떤 노래든 다 연주할 수 있다며 애국가만 집중적으로 알려줬다.

"요기서 불고 여기서 마시고 해 봐."

상호형은 옆에서 담배를 피웠다.

형이 불던 하모니카에서 담배 냄새가 심하게 났지만 꾹 참고 배웠다. 신기하게도 애국가를 보름 동안 연습한 결과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학교 종을 연주할 수 있었고 고향의 봄과, 오빠 생각까지 모든 동요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가 젓가락 두드리며 부르던 유정천리도 어렵지만 문제없었다.

곤충채집이나 땅따먹기도 하지 않은 채 나의 여름방학은 하모니카와 함께 끝이 났다.

물론 여름방학이 끝날 때까지 상호 형의 담배 심부름을 꾸준히 했다. 상호형도 방학이 끝나 읍내로 가던 날 하모니카를 선물로 주고 갔다.



난 계명을 몰라도 하모니카를 연주할 수 있다.


부반장 미희에게 하모니카로 모든 동요는 다 연주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영식이도 옆에서 맞장구치며 추켜세웠다.

"지랄하네 계명도 모르면서 어떻게 연주를 하냐. 저리 가 꼴찌들하곤 안 놀아."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양 갈래로 땋은 머리를 세게 잡아당기고 도망을 갔다. 미희가 울면서 선생님께 고자질하는 바람에 손바닥 두 대를 맞았다.

음악 시간이다.

"너 정말 음악책 안 보고 연주할 수 있어? 거짓말이면 손바닥 다섯 대야."

선생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나오라고 했다.

교단에 섰다. 손바닥이나 엉덩이 맞을 때만 불려 나왔는데 오늘은 60명 앞에서 연주하려고 나왔다. 섬집 아기를 연주했다. 연주하면서 미희를 쳐다보니 놀라는 눈치다.

선생님도 특이한 놈으로 보는 거 같다.

성공했다. 계명을 모르는 꼴찌라도 하모니카 잘 분다는 것을 미희는 알아야 한다.

"선생님! 미희가 노래하고 제가 옆에서 연주하면 안 돼요? 아무 노래나 상관없어요."

잘난 척을 하자 미희가 벌레 씹은 얼굴을 했다.

"그래? 선생님이 풍금으로 화음 넣을 테니까 미희가 나와서 노래해 봐. 너는 미희 옆에서 하모니카 연주하고."

우헤헤, 너무 좋아서 히죽거렸다.

미희가 나오면서 눈을 흘기고 알 수 없는 쌍욕을 했다. 아무도 못 들었지만 내 귀엔 들렸다.

"야 저리 좀 떨어져."

미희가 어깨로 저만치 밀어냈다.

"안돼! 선생님이 니 옆에서 연주하랬어. 너 왜 선생님 말씀 안 듣냐."

귀에다 대고 점잖게 타일렀다.

미희가 어이없었는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두 손을 모으고 구슬비를 시작했다.

'쏭알쏭알 싸리 잎에 은구슬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 대롱대롱 풀잎마다 총총..."

선생님의 풍금 소리와 미희의 노래, 나의 하모니카,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천상의 하모니였다. 미희는 지옥이겠지만... 우헤헤

선생님이 잘했다고 칭찬도 했다.

쉬는 시간마다 미희 옆에서 하모니카를 불고 다녔다.

"야! 시끄러우니까 나가서 불어."

미희가 신경질 냈지만 저 지지배는 내가 부러우니까 배가 아파서 지랄하는 게 분명했다. 점심시간 잡곡 도시락 먹을 때도 밥 한 숟가락 먹고 하모니카 불고, 신 김치 한 쪼가리 먹고 또 불었다.



불쌍한 하모니카


음악 시간에 나의 잘난 척을 도와줬던 하모니카가 더럽게 죽고 말았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하모니카를 바지 올리다가 학교 변소에 빠트린 것이다.

낮에도 어두운 변소를 내려다봤지만 하모니카는 보이지 않고, 빨간 손, 파란 손 귀신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하모니카가 불쌍해서 울었다. 톱밥창고 뒤에서 참매미와 같이 울었다. 영식이 어깨에 기대어 울고 있는 나를 보며 미희가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 약을 올렸다.

인정머리라곤 코딱지만큼도 없는 지지배다.

엄마에게 하모니카 사달라고 졸랐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뽀빠이 하나 사 먹으려 해도 갖은 욕을 다 들어야 했으니까 하모니카는 택도 없었다.

유일한 자랑거리도 없어지고 미희만 보면

내 하모니카 연주에 맞춰 노래하던 미희의 맑은 목소리가 귀에서 앵앵거렸다.

이제 미희와 교단에 나란히 서있을 일은 없겠다.


쏭알쏭알... 구슬비를 다시는 부르지 않을 것이다.

쏭알쏭알... 구슬비는 구슬픈 동요다. 나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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