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로선 Jul 04. 2023

장마

그저 그런 하루



전국적으로 호우주의보가 확대되고, 예외 없이 공단에도 비가 내린다. 공단이라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소박함. 보잘것없는 작은 공장들이 옹기종기 모여 하루의 먹이를 생산하고 있다.


밤 아홉 시 퇴근을 한다.

우산을 쓰고 최대한 비를 안 맞으려고 애써보지만 오분도 못 가서 엉덩이까지 젖어버린다.

이제 옷이 젖을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겠다.

포기하니까 마음도 편해진다.

8번 버스는 오늘도 배차시간을 안 지켜 십분 이상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옷도 젖은 김에

걷기로 한다.


GS 편의점에서 다섯 번째 가로등, 며칠씩 지직 거리며 신음하지만 신경이 끊어지기 전에는 고쳐줄 생각이 없나 보다. 불쌍해서 신경 쓰인다.

앞서 걷던 베트남 여자 둘이서 야근하고 가는지 투명우산 하나에 머리를 기대고 큰소리로 웃는다.

고음의 웃음소리가 탄산수처럼 청량하다. 웃는 소리에 잠시 우울감이 사라졌다가 보도로 바싹 붙어가던 벤츠가 물 한양동이를 튀기고 쏜살같이 내빼는 바람에 기분이 안 좋다.

벤츠에 탄 남자가, 혹은 여자가 폭우 속에 아무 사고 없이 가족들 만나라고 안녕을 빌어본다.

문득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제주도 성산포에 가고 싶어졌다. 포말을 일으키며 뒤척이는 성산포의 바다. 물벼락을 맞고 왜  성산포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피식 웃음이 난다.


고가도로 밑 횡단보도에서 보행신호를 기다린다. 트레일러가 비상 깜빡이를 점멸하면서 무심히 지나간다. 빨간 후미등한쪽이 꺼져있다.

한 사람이 무단횡단을 한다. 얌전히 기다리던 네댓 명의 보행자들이 그를 따라 길을 건넜다. 지나온 길에는 그제야 녹색의 물결이 일렁거린다.


신호등 건너편 대박 로또방.

로또용지에 심각하게 점을 찍고 있는 남자 하나와 눈이 마주치지만 서로가 빠르게 외면한다.

콧수염을 기른 내 또래의 남자다.

복권 천 원어치를 자동으로 산다. "대박 나세요."

복권방 주인이 습관적 은총을 내려준다.

복권이 젖지 않게 휴대폰 케이스 깊숙이 보관한다.

아마도 아내에겐 복권 샀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당첨되면 한 달에 오백만 원씩 능력 있는 남편처럼 월급이라고 갖다 줘야지.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우리은행 앞에서 올려다본 상가건물 이층 첫 번째 집 불이 켜져 있다.

오늘도 아내는 상추를 씻었을까? 

해마다 이맘때면 주인아줌마가 텃밭에서 솎아온 상추를 하루가 멀다 하고 가져오는 바람에 이틀에 한 번은 상추를 먹는다. 아내 말로는 노지에서 키운 거라 잎도 작고 벌레도 많다고 한다. 나는 한 시간 동안 씻은 상추를 입이 터져라 십 분 만에 다 먹어 버리고, 아내가 하는 말에 적당히 리액션을 한다.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가 한쪽 끝이 꺼멓게 말라가는 주광색 형광등을 갈아달라고 하지만, 내일 해준다 말하고 잠이 든다.


비는 그치지 않았고 성산포의 파도 소리도 그치질 않았다.



아내의 흰머리


흰머리를 뽑아달라고 한다

뭐 벌써 흰머리냐 타박했지만

정수리 뒤쪽에서 가엾게 반짝이는 

은빛의 세월들


흰머리 세 개를 뽑고 나서

흰머리는 하난데 두 개는

검은 머리 잘못 뽑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흰머리 하나쯤은 새치라고

우겨도 봤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었지만

이번만은 진심으로 하는 내 거짓말을

믿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밤낚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