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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Aug 08. 2023

출근길 지하철


출근길 아침부터 햇살이 따갑다.

역 화단의 해바라기, 눈을 크게 열고 일 분 동안 들여다본다. 벌써 해바라기의 주근깨가 여물어 간다. 더 자세히 보면 가을이 어디쯤 오고 있나 알 수도 있다. 앙증맞은 채송화들도 해바라기 발 밑에서 무더기로 자라고 있다. 지나가던 고딩들이 "씨발 존나더워." 여름을 향해 욕지거리를 한다.


구박받는 계절, 손, 발이 얼고 마음까지 시린 겨울이 오면 한낮의 폭염도 그리워지겠지. 

난 지금껏 계절만 가는 줄 알았다. 여름이면 덥다고, 겨울이면 춥다고 계절이 빨리 바뀌길 바랐는데, 돌아보니 찬란했던 나의 시간도 계절 따라간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여름이 빨리 가라고 등 떠밀지 말아야겠다.

그렇다고 여름의 멱살을 잡고 세월아 가지 말라고 사정하고 싶지는 않다.


역사를 청소하던 늙은 아주머니와 인사를 한다.

항상 밝게 웃는다. 아침에 무척이나 어울리는 인상이다.

"쉬엄쉬엄하세요."

작은 토마토 주스 한 병을 건넸다.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시원하게 마신다.

후회했다. 쉬엄쉬엄하라는 의미 없는 말, 얼마나 생각 없이 지껄인 말인지. 누군가의 시를 받고 청소하는 처지에 잠시라도 눈치 안 보고 쉴 수 있을까. 차라리 '눈치껏 하세요.' 할 걸 그랬다.


지하철 문이 열린다.

그만큼의 사람이 내리고 그 이상의 사람이 탄다.

지하철 에어컨 바람이 기분 좋게 머리를 빗질한다.

검은 정장의 사내가 옆에서 밀고, 백팩을 앞으로 맨  남학생이 등을 압박한다. 한번 몸을 뒤척여 보지만 꿈적도 하지 않는다. 진퇴양난이다.


젊은 여자가 밀리고 밀려서 내 앞에 서 놓고선 불편한 듯 뒤돌아본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괜히 미안하다. 지하철의 거대한 몸뚱이가 좌우로 흔들린다. 이 구간은 비포장 철로인 건가 심하게도 덜컹거린다. 젊은 여자가 중심을 잃더니 얇은 운동화의 엄지발가락을 밟는다. 힐을 신었는지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프다. 신발 속의 발가락을 꼼지락 거려본다. 골절은 아니지만 심하게 욱신거린다. 미안하다고 말하면 괜찮다며 친절하게  웃어줘야지. 기다리지만 말이 없다. 사과할 타이밍을 놓쳤을까 섭섭하다.  

차창으로 반사되는 그녀의 얼굴을 쏘아봤다.

아무 일도 없는 듯 그 와중에 카톡을 한다.

내가 그녀의 일기를 훔쳐본 것처럼 또 한 번 뒤돌아보며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까 난감하다.


어차피 기분 나빠진 거

어깨너머로 힐끔 그녀의 문자를 본다.

'엄마! 힘내고 사랑해.'

꿀 떨어지는 빨간색 하트가 다섯 개나 있다.

'엄마도 사랑해.'

빠르게 답장을 보낸다.

천사들의 교신이다.

사랑한다는 세 음절에 나는 그녀의 불친절을  용서하고 말았다. 숭고한 사랑의 고백에 잠시라도 미워했던 마음이 무너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젊은 엄마의 오늘 하루에 안녕을 빌었다.


회사에서 양말을 벗어본다. 엄지발톱 끝이 검붉게 죽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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