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의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은 자기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한다. 물론 대체로 그러하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익숙한 경험의 세계에서만 그러할 뿐이다. 관성(慣性)적으로 머물던 세계 안에서의 자신만이 자기가 알고 있는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항상성의 테두리를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아니 자신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거기에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나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이다.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거의 그렇게 알고 있다. 누가 다가오거나 말을 건네는 걸 무척 부담스러워했었다. 그렇다고 그가 싫거나 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누가 나와 친근해지려고 다정스레 말을 걸어도 외마디 이상의 말을 한 적이 없다. 당연히 내가 그와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인상을 주었을 테고 그의 성의 있는 접근을 무색하게 했다.
살다 보면 여러 상황이 나에게 뭔가를 요구한다. 하지만 나의 성향이나 기질은 그 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부응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외향형의 사람에게나 어울릴 법한 것을 내게 요구하지만 그건 내가 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때로 상황은 내가 앞장서서 어떤 일을 하기를 요구하지만, 나는 조력자에 어울리는 사람이지 주도자의 위치에 있을 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의 요구가 있을 때마다 누군가가 나를 대신했다. 하지만 아무도 대신할 사람 없이, 그 상황의 요구 앞에 오롯이 홀로 있을 때면 나는 무기력하고 초라해지는 자신을 적나라하게 마주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이대로 나이 들어서는 안 되겠다.’라고 다짐하게 됐다. 어떤 계기에서 그런 마음을 품었는지는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아마 책을 읽다가 자극받은 것 같다.
어쨌거나 나는 의지적으로 조금씩 변화를 시도했다. 주변의 지인들이 나를 인지하던 인식, 내가 스스로에 대해 지녔던 고착된 인식에서 벗어나려 했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했다.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서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자리를 찾던 내가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되는 한가운데 자리에 일부러 앉았다. 지금은 그 자리가 편하다. 어쩔 수 없이 구석진 자리에 앉게 되면 어쩐지 기분이 찜찜하다. 이제는 누가 말을 걸거나 다가오는 것도 불편하거나 부담스럽지 않다. 오히려 내가 먼저 다가서고 말을 건다. 오죽하면 단골 식당 아주머니가 나더러 말이 많단다.
여전히 어떤 상황이 요구하는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나의 기질이나 성향상 불편하고 부담스럽다. 하지만 이제는 회피하지 않는다. 비록 잘 응하지 못하고 그것을 마주하는 내가 어색하다 하더라도 주저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거북한 상황을 감내하는 것에 모종의 쾌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또 다른 나를 정복하고 세상을 대하는 처신의 영역을 확장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그 상황의 요구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단순히 나와 다른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나와 다를 바 없는 자신을 극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먼 훗날 자기 삶의 반성적 회고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매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다. "너는 이 순간에 왜 숨어있으려고만 하느냐? 왜 너는 이 필연의 순간에도 적극적으로 자신을 던지지 못하느냐?"
세상은 우리를 선택하여 대하지 않는다. 우리의 기질적 특성이 삶에서 막딱뜨리는 세상의 요구를 피하는 면책의 이유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는 세상의 크고 작은 도전에 응하면서 성장해 간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라는 말은 비단 종교적 고양만을 말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자유는 강제와 속박에 반(反)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자연스러움을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유란 익숙하고 자연적인 나로 머물려는 속성에 저항하고 거스르려는 의지이고 자신을 강제하는 힘이다.
세상은 '나'라는 속박에서 나를 구원하여, 보다 풍요로운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신이 마련한 해방의 무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