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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준 Apr 22. 2022

우리에게 다음날 밤이란 없다네

‘밤 끝으로의 여행(Louis-Ferdinand Celine)’을 읽고


“우리에게 다음날 밤이란 없다네.”


 ‘밤’은 인생이다. 내일의 보금자리는 어둠의 숲에 가려져 있다. 알 수 없다. 다음날 떠오르는 태양의 광화를 맞이한 이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저 헐떡이는 심장을 따라 흔들리는 밤의 수풀들을 더듬으며 사색으로 나아갈 뿐이다. 밤의 끝으로 갈수록 우리는 어떻게 변해가는가.

 파리 끌리쉬 광장에서 전장에 휩쓸려 가며 시작된 바르다뮈의 ‘여행’에 따라 우리는 밤의 끝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마주한다. 누와르쉐르에서 처음 만난 ‘로뱅송’부터, 식민지 또뽀의 ‘알씨드’, 디트로이트의 ‘몰리’, 다시 가렌느-랭시의 ‘앙루이유’ 가족들과 빠리의 ‘파라핀’, 비니-쉬르-쎈느의 ‘바리톤’, 뚤루즈의 ‘마들롱’까지.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바르다뮈의 시선 아래에 놓여 밤으로 함께 흘러간다. 사실 바르다뮈의 여정 자체보다는 각 인물들에게 닿는 바르다뮈의 시선이 책의 주된 서술이자 주제에 가깝다. 그는 다음과 같은 태도로 인물들의 겉과 속을 훑는다.


 언제나 또 어디에서나 그랬던 것처럼 나는 단지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에 귀를 기울일 만한 힘이, 그보다 더 멀리 나아갈 힘이, 그 괴이한 힘이, 나의 내부에서 치솟고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리하여 다음번에는 더 아래로 내려가, 내가 아직 들어보지 못한, 혹은 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다른 탄식들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떠한 탄식이건, 그 탄식 너머에는 우리가 아직 들어보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 또 다른 탄식들이 있을 것 같았다.


 밤으로 향하는 군상의 탄식들에  기울여 갈수록 바르다뮈 내면의 탄식도 꿈틀거린다. 남들처럼 밤의 끝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인과의 여정에서, 탄식의 형태로 내면의 목소리를 담아내 보려는 바르다뮈의 의지의 표출 과정 또한 소설 사이사이 드러난다. 누구에게 쏘는지 불명확한 기관총처럼 무가치한 전쟁에 대해 회의와 냉소를 안고 있었던 바르다뮈 내면의 자아. 연인이었던 ‘롤라곁에서 처음으로 영화관을 찢으며 터져 나온  자아는, 롤라를 포함한 영화관  반듯한 신사숙녀들에 의해 질병이자 흔한 전후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치부되고 바르다뮈는 병원으로 이송된다. 이후 후반부 ‘축제장면 즈음에 다시 격정적으로 풀어헤쳐 나오기 전까지  자아의 목소리는  깊이 내면으로 가라앉는다. 자신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만큼 그는 세태와 군상 관찰에 더욱 몰두한다. 편집증 징후를 드러낼 정도로 그는 근대 격변기의 유럽과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세태를 묘사해 나간다.  눈과 온몸으로, 때로는 의식의 흐름대로 나아간다. 세태에 휩쓸려 가는 각지의 인물들은 망라된 삶의 면모들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끝으로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간다. ‘마들롱이나 ‘앙루이유 노파처럼 현실  실존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기도, ‘로뱅송처럼 주체성을 지니고 실존에 마주하나 실존의 다채로운 면모에 방황하기도, ‘귀스따브처럼 실존  자체를 인지조차 못하기도 하지만 모든 이들은 무심한  격동하는 밤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별을 따라가는 여정의 끝이 혹시 칠흑의 늪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무언의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밤은 무겁게 그들을 엄습해온다. 그들은 모두 유예 상태의 피살자이다. 우리는 목격자이며 밤이 저지른  사건에 대해 증언해야 한다.

 ‘모든 흥미로운 일은 반드시 어둠 속에서 진행된다. 따라서 사람들의 진정한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라는 구절처럼 어둠은 우리의 눈에 익은 역사와는 거리가 먼 장면들을 늘어놓는다. 극장투성이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연극과는 다른 양상으로, 어둠 속 장면들은 바르다뮈의 시선처럼 냉소적이며 냉혹하고도 차갑다. 그러나 그에 대한 묘사는 극히 참신하다. 이는 고상함을 깨는 순박하고 거친 작가의 언어적 감각과 작위적이고 부조리한 사회를 꿰뚫는 그의 시선이 투영된 것으로, 세간의 평처럼 가히 ‘혁명적’이라 하겠다. 물론 그 사상까지도.

 사실 혁명을 소설 속에서 몸소 이끌어가는 자는 바르다뮈가 아니라 로뱅송일지도 모르겠다. 바르다뮈가 보기에 그는 ‘나’와 같은 유형의 인간이 아닌, 적어도 정착과 적응을 모르는, 그러나 생존(실존)에 필요한 수단과 술책을 능히 꿰뚫고 있는 몽상가이자 모험가이다. 전쟁터와 병원, 식민지, 미국, 다시 프랑스까지, 밤의 권태와 맞서던 그는 폐병과 돈, 결혼이라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부르주아적인 요소에 심취하기도 하지만, 다시금 모든 것에 구역질을 느끼고 흘레하는 사랑놀음에 진저리 친다. 밤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바르다뮈의 앞에 서서 노를 저어가던 안내자이자 선구자이기도 했던 그였지만, 그 역시도 허무로 치닫는 결말을 거스르지 못한다. 축제 이후 택시 안에서 현실주의자인 마들롱의 총에 맞은 로뱅송은 죽음으로써 자신의 녹을 벗고 밤으로 향하는 여정을 마친다.

 이처럼 소설의 후반부는 허무와 권태가 여정에 자리 잡는다. 스스로를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했던 바르다뮈 역시 거창한 말로 감싸 놓은 자신의 보잘것없는 본능들을 발견한다. 밤의 끝이 도래함을 알리는 허무와 권태의 도가니에서 벗어나고자 축제로 주변인들을 이끌며 발악하지만, 서로 다른 사념에 잠식된 이들은 이미 공허의 무대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공허 속에 고립되어 가는 외로운 바르다뮈의 여정. 어쩌면 우리 모두의 밤은 허무와 권태 속에 자리 잡는 고독일지도 모른다. 총에 맞아 죽어가는 로뱅송 앞에서, 진흙투성이의 어둠으로 사라지는 마들롱을 바라보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한 사랑이 결여된 채 ‘위대하지 않은’ 바르다뮈는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우리는 모두 간악한 자들. 나머지 모든 것은 중도에 떠나버렸고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그 짐짓 꾸민 표정마저 나는 몽땅 잃어버렸다.

 스스로 삶 앞에 다시 서지 않기 위하여 나 스스로 길을 잃으려 애를 썼지만 모두 허사, 어디를 가나 그 삶을 다시 만날 뿐이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올 뿐이었다. 나의 방랑은 돌이킬 수 없이 끝나 있었다.


 밤의 끝으로 가는 여정에서 아무리 길 밖으로 벗어나려고 해도 끝내 마주하는 허무나 권태. 심연의 밤은 찾아왔다. 모두 각기 다른 여로를 따라 살아가지만 황혼을 지나 마주하는 밤의 끝은 그동안의 우리의 방랑을 무색하게 만들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처럼 예인선이 다가와 우리를, 거룻배를, 하늘과 들판을, 강과 도시를 밤의 끝으로 끌어갈 때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밤의 끝이 예정되어 있다면 각자의 여로에서 우리는 무얼 소중하게 여길 것인가. 더 치열하게 길 밖으로 이탈하고자 시도할 것인가, 밤이 오기 전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끌어안고 함께 흘러갈 것인가. 아니면 밤하늘을 보고 누워 공허의 밤과 우주의 끝을 가늠해 볼 것인가. 충분한 시간을 두고 탐색하기에는 우리의 낮은 너무 짧다.

 시대의 흐름 속에 다채롭게 살아가는 인간과 인간성의 본질을 다룬 측면도 흥미롭지만, 그보다는 지금도 숨죽이며 흐르고 있는 군상들의 ‘삶’, 인간으로서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삶의 여정 그 자체에 초점을 두고 감상하면 좋을 거 같다. 인간이라는 허물을 덮고 태어난 이상 목적지는 밤이고 우리는 밤의 끝으로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어떤 ‘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밤에 끝에서 어떤 무대가 펼쳐질 것인지, 풀숲 너머 저멀리 보이는 낯선 불빛은 찰나의 신기루일지 내일의 태양일지. 어둠이 가라앉는 황혼이 다가올 무렵에 다시금 읽어보고 싶다.


20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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