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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준 May 14. 2022

기록을 남기는 이유

추체험의 여로

빛바랜 종이를 한 장씩 들출 때마다

쭈뼛쭈뼛 글자들이 움직인다

저마다의 색으로 번진 글자들이 뒤섞이며

어디엔가 묻혀 있던 문장들이 드러난다

홀로 빛나는 가로등 아래

겨울밤 별무리와 동행하는 그림자


아직 밤바람은 차가워

한 장 한 장 넘기는 손끝이 시리기도 하지만

오늘보다 더 추웠을 그 겨울의 가로등 불빛을 들추면

그림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여린 손길로

차가운 등불을 더듬으며

유난히 평평한 두 발로 모난 세상을 누비던 그림자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세상을 밟아온 나는

그게 자랑이랍시고 늙어 빠진 이야기를 입에 담아 보지만

이내 그가

한낱 낡은 종이 속에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울퉁불퉁 땅바닥에 흩어진 세상의 조각들

지그시 밟아오며

흑백으로 물든 돌무리에 피를 흘리기도

곧 이지러질 둥근 달에

여린 손가락을 곧게 세우기도 했던

종이 속 그의 이야기가 도리어 듣고 싶어 진다

추운 겨울 환한 가로등 아래

식어버린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고 싶다

그동안 짊어져온 응어리만큼

두터워진 이 손으로 그 여린 손을 잡으면

조금은 따뜻한 흔적이 종이 세상에 번질 수 있지 않을까


지난 일이라고, 추억이라고 불리던 그때도

그 세상의 현재였다


지금 또 이렇게 무겁게 가라앉은 손끝의 점도로

종이 위에 글씨를 새기면

훗날 닳고 닳은 세상 이야기들이 들려오는 순간에

불 꺼진 종이 아래 잠든

외로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저마다의 글씨를 새긴다



2021.2.9.

제주 하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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