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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neholism Nov 25. 2023

요란하지 않은, 가벼운 자축은 펫낫과 함께

와인이 필요한 모든 순간

지난 1월 말, 저는 오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축하할 일이었지요. 오랜 고민을 거쳤고, 확신이 선 후에 끝에 결정한 일이었기에 격한 감정의 요동 없이 담담한 상태였습니다. 근사한 식당에 가서 대단한 와인을 열기보다는 집에서 조촐하게, 그렇지만 경쾌하게, 이 날을 자축하고 싶었지요. 그런 날에 어울릴만한 와인은 어떤 게 좋을까요? 축하주로 샴페인이 가장 먼저 떠오르긴 하지만 담담한 저의 상태와 썩 잘 들어맞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포가 없는 스틸 화이트 와인이나 레드와인은 또 약간 서운한 기분이 들더군요.


결국 냉장고에 차게 보관 중이던 펫낫에 남편이 해주는 백짬뽕을 곁들이기로 했지요. 담담하면서도 후련한, 가벼워진 마음을 잔잔한 기포가 감싸주고, 상큼한 산도가 기분을 더 끌어올려주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에게 펫낫은 그런 순간에 생각나는 와인이에요. 아주 기쁜 일 앞에는 오히려 감정이 담담해지고, 힘을 좀 빼고 싶어지는데 그럴 때 잘 어울리는 와인이라 생각하거든요.


펫낫(Pét-Nat)은 ‘페티앙 나튀렐(Petillant Naturel)’의 줄임 표현입니다. 약한 기포가 있는 가볍고 상큼한 스파클링 와인이죠. 마개도 샴페인 하면 떠오르는 두꺼운 코르크가 아닌, 캐주얼한 맥주 병뚜껑 같은 크라운 캡으로 되어있어 어쩐지 더 경쾌해 보입니다. 소비뇽블랑으로 만든 모지의 펫낫은 특히 음식과 아주 잘 어울렸어요. 백짬뽕도 사용하는 소스가 감칠맛이 있기 때문에 와인 매칭이 쉬운 편은 아니거든요. 저는 이런 어려운 매칭에 치트키로 스파클링 와인이나 내추럴 와인을 치트키로 활용하곤 해요.


스파클링 와인은 만드는 방식에 따라 여러 카테고리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전통방식, 고대방식, 탱크방식, 아스티 방식 등 톡톡 터지는 버블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아주 다양합니다. 제가 마셨던 펫낫은 고대방식 스파클링(Method Ancestrale) 와인으로 분류되죠.


첫 번째 글로 펫낫, 즉 고대방식 스파클링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합니다. 하고 많은 와인 이야기 중에 왜 상대적으로 마이너 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와인이 가장 먼저 떠올랐을까요? 그건 제가 와인의 세계에 직업인으로 합류하기 위해, 저의 과거와 작별하던 순간을 장식했던 와인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술이었죠. 그래서 제가 사랑하는 다양한 와인 이야기를 글로 전하려 했을 때, 시작은 바로 이 펫낫이어야만 했어요.


가장 오래된 방식의 스파클링 와인

와인에 대해 꽤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돔페리뇽이 샴페인을 개발했다거나, 혹은 그건 와전된 설이라거나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파클링 와인의 대명사인 샴페인은 최초의 스파클링이 아닙니다. 대신, 가장 진보된 스파클링 와인이라 할 수 있죠. 샴페인에 대해서는 언젠가 더 자세히 소개해보도록 할게요. 그럼, 최초의 스파클링 와인은 뭘까요? 바로 오늘 소개하는 펫낫, 즉 ‘고대방식 스파클링’ 와인입니다.


최초의 스파클링 와인은 1531년 프랑스 남부 ‘랑그독‘ 지역의 ’리무(Limoux)’에서 탄생했습니다. ‘생 힐레르 대 수도원’에서 탄생했다는 기록이 있지요. 지금도 ‘블랑께뜨 리무(Blanquette de Limoux)라는 이름으로 생산되고 있습니다. 스파클링 와인의 탄생 조건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와인을 만드는 방식과 조건을 조금 이해하고 가야합니다. 간단히 설명드려볼게요.


와인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우선 북반구를 기준으로 포도 수확은 가을에, 알코올 발효는 늦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진행됩니다. 포도즙이 와인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효모가 당을 먹어치우고, 이산화탄소알코올을 배출하는 활동을 해야 하는데요, 이 효모가 활동하는 온도가 문제가 됩니다. 보통 10도에서 35도 사이에서 활동한다고 알려져 있죠. 5도 이하로 내려가면 활동을 멈추고 동면에 들어가고, 너무 높은 온도에서는 사멸합니다. 랑그독 지역은 프랑스 남부에 있지만, 내륙의 산맥에 자리 잡은 리무 지역은 꽤 서늘한 기후를 유지하고, 겨울에는 기온이 꽤 내려가기도 합니다. 당시 유럽은 소빙하기(13C~17C)가 계속되고 있어 겨울이 더욱 추웠겠지요.

지도출처: 와인폴리 (https://media.winefolly.com/Languedoc-Rousillon-map-by-bentoit-france.jpg)


우연이 탄생시킨 스파클링 와인

1857년 루이 파스퇴르가 효모의 존재를 발견하고 규명하기 전까지, 인간은 오랫동안 발효주를 빚어오면서도 효모의 활동이나 발효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술이 빚어지는 동안에는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오는게 육안으로 관찰이 되니, 그 기포가 더 이상 생기지 않으면 술이 다 되었다고 받아들였지요. 기포가 잠잠해지면 통이나 병에 술을 담았겠죠? 그런데 소빙하기 동안, 리무나 샴페인처럼 겨울 기온이 급격하게 내려가는 지역에서 와인에 뭔가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봄이 되어 온도가 올라가면 병이나 통 안에서 기포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죠. 심지어 병이 터지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동안 동면에 들어갔던 효모가 온도가 올라가면서 다시 활동을 시작하며 기포가 생긴 것이죠. 이것이 스파클링 와인의 시작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와인 산지는 온도조절 장치를 사용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며 와인을 만들죠. 지금 같은 환경이라면 이런 와인이 우연히 탄생할 일이 없었겠다는 생각이 드니 그때 그분들은 고생하셨겠지만, 참 다행입니다. 그 우연이 없었다면, 스파클링 와인을 못 만났을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스파클링 와인은 그야말로 우연이 만들어낸 특별한 와인이네요.


한 번만 발효시키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의 스파클링 와인


고대방식 스파클링 와인은 기포를 만들어내기 위해 두 번 발효를 거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의 알코올 발효 중에 기포도 만들어낸다는 특징이 있어요. 혹자는 그래서 펫낫을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의 스파클링 와인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그래서 자연의 흐름에 따라 와인을 만드는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이 펫낫을 많이 생산하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펫낫을 만드는 과정

지금의 펫낫이 만들어지는 양조방식을 조금 더 알아볼까요?

우선 수확한 포도의 즙을 짜냅니다. 화이트 와인을 만들 때는 일반적으로 포도 주스만 사용해요. 짜낸 즙에 효모를 투입해 발효를 시작합니다. 발효 온도는 화이트와인이니 12~22도 사이가 되겠지요. 발효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을 때, 와인을 병에 담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발효가 병 안에서 마무리되도록 두는 것이죠. 그러면 자연스레 발효과정에서 생긴 이산화탄소가 와인에 녹아들게 됩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의 스파클링 와인이 완성된 것이죠.


위에 있는 펫낫 사진에서도 관찰할 수 있듯이, 병 바닥에 침전물이 있는 경우가 흔해요. 죽은 효모의 찌꺼기죠. 발효가 끝났다고 효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저런 침전물의 형태로 남아요. 발효가 덜 끝난 채로 병에 담았으니 그 효모가 병 안에 흔적을 남긴 것이죠. 침전물을 걸러내고 출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저 앙금이 와인에 복합미를 더해주기도 하기 때문에 일부 혹은 전부를 일부러 남겨서 출시하는 경우도 흔해요.

지난 3월에 찾았던 청주의 내추럴 와인 양조장 ‘레돔’에서 테이스팅 했던, 발효 중인 시드르의 모습입니다. 시드르는 사과 발효주인데, 펫낫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요. 통 안에 발효 중이던 사과 와인을 꺼내 맛 보여주셨어요. 아직 발효가 다 된 것은 아니어서 당분이 제법 남아있었고 달콤하게, 상쾌하게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 남은 당분과 효모가 병 속에 갇히면 보글보글 기포를 만들어주는 거겠죠?




평소 펫낫을 아주 자주 마시는 건 아닌데, 유독 기분 좋은 추억을 많이 남겨준 것 같아요. 기분 좋은 날, 한껏 힘 준 와인도 좋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경쾌하게, 펫낫 한 잔 어떠신가요?



다음 글은 대하 철에 어울리는 와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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