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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응세개 Jan 14. 2024

[단편소설][오디오북]엄마의 유언

어떻게 살 것인가


“다녀왔어요.”


작은 원룸에 혼자 사는 미영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책상·의자에 앉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사진 속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에게 인사를 건넨다. 어느새 자신보다 젊어진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을 얼마간 말없이 들여다보고 있던 그때 미영의 핸드폰이 울린다. 벽면에 덩그러니 걸려있는 초록색 벽시계를 바라보고, -시곗바늘은 밤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액정화면 속 발신자 이름을 확인한 미영이 핸드폰을 뒤집어 책상에 두었지만, 핸드폰 화면 불빛이 계속 깜빡이며 존재감을 드러내어, 미영은 결국 통화버튼을 누르고 만다.
-네... 네... 먹었어요... 네... 네... 들어가세요, 따위의 말을 몇 마디 내뱉곤 미영이 얼른 전화를 끊는다. 미영이 피곤한지 바로 잠자리에 들 채비를 한다. 초록색 벽시계의 시곗바늘이 아까 그 자리에서 그리 멀리 가지 못한 것을 확인한 미영이 두 눈을 감자, 5평 남짓의 원룸에선 생명력이라곤 온데간데없고, 미영마저 원룸에 자리한 몇 없는 가구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사는 집의 배경이 되어간다.

초록색 벽시계가 새벽 2시 58분을 가리키고 있다. 미영의 핸드폰 문자 알림 소리와 함께 화면에 메시지가 뜬다.
*
나야, 큰 미영.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이번 달 생활비가 부족해서. 백만 원만 빌려줘. 내 계좌번호 알지? 문자 보는 대로 입금 좀 해줘. 돈 생기는 대로 바로 갚을게~
KC 은행 박미영으로 입금하면 돼.
*
잠귀가 밝고 꽤 예민한 편인 미영이지만 계속되는 야근에 피곤한지 문자 소리에도 다행히 미영은 깨어나지 않았다. 미영의 끝나지 않은 고달픈 하루는, 아니 새로운 하루는 큰 미영, 아니 박미영의 문자 메시지 알림으로 이미 시작된 모양이다.

“다녀올게요.”
사진 속 여자에게 인사를 건넨 미영이 출근길 가방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한 짐을 가지고- 마치 여행자의 짐처럼- 버스를 타고 힘겹게 출근한다. 제일 먼저 회사에 도착한 미영은- 매우 익숙한 듯-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상당히 묘한 행동을 하고 있다. 어느 자리에는 가방을 놓고, 어느 자리에는 서류철들을 나열하고, 어느 자리 의자에는 재킷을 걸쳐놓고, 어느 자리에는 텀블러 등을 놓는 등 한참을 바삐 움직인 미영이 그 일들을 다 끝내놓고 맨 마지막으로 자신의 자리에 앉았을 때 사람은 미영 말고 아무도 없었지만 마치 모두 출근하여 화장실을 가고, 다른 부서에 가서 잠시 자리를 비운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두 번째로 출근한 사람은 김미숙 과장이었다. 김미숙 과장은 정확히 9시 정각에 출근하였다. 일 분이라도 늦거나, 빠르게 출근하는 법이 없었다. 미영은 그것이 참 신기했다. 유일하게 미영에게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또 그것이 미영을 얼마나 한심하게 볼까 싶어 김미숙 과장 앞에서는 잘못한 것도 하나 없는데도 몸부터 잔뜩 움츠러들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최 이사가 올 것이고, 사무실을 빙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들 아침부터 바쁜 모양이군, 한마디 하고선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가 축구 경기를 보면서 컴퓨터로 맞고를 칠 것이다. 최 이사가 오고 일이십분쯤 지나면 한두 명씩 분위기를 살피며 몸을 숙인 채 자신의 자리로 스멀스멀 기어가, 누군가는 인터넷 쇼핑을, 누군가는 주식이나 가상화폐를 할 것이다. 그러고도 심심하면 가끔은, 아주 가끔, 일을 할 때도 있다. 회사의 오전 풍경은 대체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미영의 핸드폰에서 문자 알림이 뜬다. 빚쟁이한테 독촉받듯 아침부터 몇 번이나 큰 미영의 문자를 받았다. 마지막 문자를 확인하지도 않은 미영은 점심도 거른 채 박 대리가 부탁한 일을 끝낸 후 그제야 컴퓨터로 인터넷 뱅킹에 접속한다. 통장 잔고를 보고 한숨이 나오는 건 미영도 어쩔 수 없다. 몇 번이나 접었다 폈는지 꾸깃꾸깃해진 메모지를 손에 들고 사무실에서 나온 미영은 화장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선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그럼에도 마치 누군가가 엿듣기라도 한다는 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출, 신용, 이자, 담보, 없어요, 따위의 말이 순서대로 오간다. 통화를 하는 동안 쓸모를 다한 꾸깃꾸깃한 메모지를 미영은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빈약한 통장잔고에 선이자를 뗀 구십몇만 원의 돈이 문자 알림과 함께 입금되자 그제야 백만 원이라는 돈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공허하게 큰 미영의 계좌로 흘러 들어간 그 돈은, 그 후로도 여러 번, 비슷비슷한 루트로 그렇게 큰 미영의 계좌로 흘러 들어간 그 돈들은, 당연하게도 미영의 계좌로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자리로 돌아온 미영은 자기 일은 제일 뒤로 미룬 채 박 대리가 부탁한 일을 가장 먼저 처리한다. 그리고 김 대리, 최과장순으로, 그리고 내일은 어떻게 할지 머릿속으로 대충 그려보다, 아직 부탁받지 않은 일의 순서까지 정해버린다. 오늘도 야근해야 할 것이라고 짐작하다 갑자기  며칠 전 일이 생각났다. 최 이사가 그녀를 대놓고 쳐다보며, 수당 챙기느라 할 필요도 없는 야근을 일부러 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던 그때, 그녀는 허둥대며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모습으로 동료들을, 선배들을 둘러보았지만 -그 누구라도 나서줄 거라 믿었던 걸까. 나의 순박한 친구, 그녀는 아직도 잘 모른다. 그리고 영원히 모를 것이다.- 다들 모르는 척 고개 숙여 일하는 척했다. 물론 김미숙 과장은 정말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날 일이 생각나 미영은 괜히 최이사 방을 한번 노려보곤 애먼 컴퓨터 키보드에 평소보다 더 힘을 실어 손을 바삐 움직인다.

하루 종일 굶은 미영은 회사 앞 포장마차에 들러 우동 한그릇을 먹고, 계산하려 일어서려는 순간, 남아있는 우동 국물이, 그리고 우연히 보게 된 우동 국물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한참 바라보던 미영이 무슨 생각에선지 다시 자리에 앉더니 이모를 찾아 소주를 한 병 시켰다. 연거푸 소주를 석 잔째 들이켜고 넉 잔째 소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그때, 김미숙 과장이 천막을 열어젖히고 들어오면서 미영의 시선과 마주쳤다. 당황한 미영은 주량이 센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다) 순간 술이 다 깨는듯한 기분이었다. 꽤 오랜 기간 같이 일을 하였지만 사석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었고, 둘의 공통점은 회사에서 일하는 유일한 직원이라는 것뿐, 아랫사람인 미영은 그 자리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미영을 김미숙 과장이 붙잡는 건-회사에서조차 말 한마디 안 할 때가 대부분이었기에 김미숙 과장은 다른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다,고 미영은 생각했다.-의외였다.

김미숙 과장은 자주 오는 듯 친숙하게 이모를 불러 닭똥집과 닭발, 소주 두 병을 시키고 서비스로 우동 한 그릇까지 받아냈다. 조막만 한 얼굴에 시원스레 생긴, 세련된 얼굴의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라고, 그리고 얼마나 자주 오면 서비스로 우동을 받을 수 있는지 미영은 궁금했지만, 물어봐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우동 국물을 떠먹으며 김미숙 과장의 먹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 그때 김미숙 과장이 미영에게 한 말은 의외여서, 그녀는 그녀도 모르게 갑작스레 딸꾹질이 나와버렸다. 덕분에 미영은 몇십 년이 지나서도 김미숙 과장과의 그날 대화를 잊지 않고 기억했다.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요?”
미영은 딸꾹질을 멈추려, 급히 물을 마시며 대답했다.
“제가요?”
김미숙 과장이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미영만을 응시하는데, 그동안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그 정도의 시간조차 내준 적이 한 번도 없었구나! 생각되어서- 심지어 부모조차도!- 이 와중에 주책맞게 나오는 딸꾹질을 멈추려 미영은 숨을 참기도 하고 목덜미를 문지르기도 하는 등 노력하였으나 소용없었다.
김미숙 과장이 계속해서 말했다.
”다른 사람들 부탁하는 거, 다 들어 줄 필요 없어요. 자기 일만 똑바로 하면 아무도 뭐라 안 하니깐. 일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요. 뭐, 예를 들면 보증을 서달라거나, 돈 빌려달라는 거. 무리한 부탁 같은 거 있잖아요. 한번은 말해주고 싶었어요.“

사실 그날 미영은 술을 마셔서인지, 따뜻한 우동 국물에 취해서인지, 딸꾹질 때문인지 김미숙 과장의 말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냥 김미숙 과장이 참 고마웠었다고 한참 후에 아빠에게 고백했다.
”내가 김 과장님한테 그날 뭐라고 했던 줄 알아요? 날 위해서 살라는 사람한테, 다들 이렇게 사는 거 아니냐고... 날 얼마나 바보 머저리로 알았을까. 엄마는 내가 바보처럼 살기 바란 건 아니었겠죠? 내가 너무 어려서, 잘못 알고 이해한거지... 이제 조금 알 것같은데... 이제야...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알 것 같은데… 나도 이제 조금 욕심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 엄마는 말 잘 듣는 착한 딸 덕분에 아프지 않고 잘 있겠네~“
미영은 아이 때도 참을 수밖에 없었던 그 울음을, 세월이 한참이나 흐르고서야 날씨가 너무 좋아 괜히 신경질이 나던 어느 날, 아이처럼 목 놓아 꺽 꺽 서럽게 울었다.

포장마차에서 술을 함께 마셨지만, 회사에서의 생활도, 김미숙 과장과의 관계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리고 몇 달 뒤, 미영은 회사를 관뒀다. 미영엔 뭔가 큰일이 일어난 듯한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그렇게 갑자기 사라졌고 –벌써 강산이 두 번 혹은 그 이상이나 바뀔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세상은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대로, 부자들은 부자대로, 소수는 소수대로 다수는 다수대로 가끔은 만족하며, 가끔은 만족할 줄 모르며(물론 만족하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살아갔다.
내가 미영의 소식을 다시 들은 건, 미영의 장례식장에서였다. 평생을 다른 사람에 이용당하며 착하게만-바보라 불리며- 살았던 미영의 장례식장에 미영을 위해 울어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김미숙 과장을- 지금은 김미숙 이사를- 만났다.

조문객이 채 열 명도 되지 않았지만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이기적 유전자를 남기고 가지 않은 미영을 보고 다행이라고, 차라리 나는 생각했다. 무엇을 위해 미영은 바보 같으리만큼 평생을 그리 힘들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거절 한 번 안 하고, 살았을까. 나는 그것이 늘 궁금했고, 미영에게 직접 물어본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본인조차 그걸 모르는 듯 해서 나의 하찮은 궁금증은 해결되지 못한 상태였다. 열 명도 되지 않은 조문객과 상주가 한데 모여 이야기꽃을 만드는 데는, 이번에도 이십여 년 전 김미숙 과장이었던 김미숙 이사의 역할이 컸다.
”미영 씨는 왜 그랬을까요? 왜 본인 살을 깎으면서까지 남들만을 위해 살았을까요? 아주 안타까워요. 조금은 이기적으로, 본인을 위해서 살아도 좋았을 텐데요.“
미영의 아빠가 이미 많이 울어서 목소리가 쉰 듯, 힘겹게 입을 조금씩 떼었다.
”미영이한테 김미숙 과장님 이야기는 들었소. 옛날에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미영이 만난 거 기억하시오? 아주 고마웠다고. 자신한테 그런 이야기 해준 사람이 없었다고. 사실 몇십 년 전, 그 이야기를 들을 땐 무슨 이야기인지 몰랐는데, 죽기 며칠 전에야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고... 진작 알았음, 좋았을 텐데 하고... 아이처럼, 정말 아이처럼 꺽 꺽 울며 많이 후회했소, 미영이는.“

쉰 목소리로, 들려준 미영 아빠의 이야기는 가슴 아파서, 그리고 미영의 인생이 너무 가여워서 사실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이 맞는 것인지를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나의 글을 읽고,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지 고민하고 또 치열하게 고민해 본다면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나는 나의 사랑하는 친구, 이제는 분명 행복을 찾았을 나의 친구, 미영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잠시 하려 한다.

미영 아빠는 지방으로 출장을 자주 다녀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는 날이 많았고, 엄마는 원래부터 아주 허약했다고 한다. 하루는 엄마가 미영 앞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진 적이 있는데, 어린 미영에게는 매우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본 뒤 미영은 그렇게나 좋아하던 유치원도 가지 않고 매일 엄마 옆에만 붙어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엄마는 큰 병원에서 폐암 진단을 받았다.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날, 어린 미영을 앉혀놓고 엄마는 당부를, -유언비슷한 –했는데 그것이 절대-라는 말을 수십번이나, 혹은 수백 번일 수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고 했다. 어린 미영은 매일 같이 피를 토해 내는 엄마를, 뼈밖에 안 남은 엄마와 새끼손가락을 서로 걸고, 서로의 손바닥을 맞대며 복사하고, 거기에 손가락으로 사인하며, 힘겹게 눈을 마주치고, 몇 번이나 당부를 받아내는 엄마의 말에 꼭 다짐해 주며, 엄마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키겠다고, 아직 다 피지 못한 그 여린 몸으로, 그것을 약속했다. 산타할아버지한테 빈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주먹을 꽉 쥐며 울지도 못한 채, 다른 사람들한테 잘할 테니깐 엄마, 제발 아프지 마요. 라고, 계속해서 빌었다고 한다.

그날 이후 미영은 평생 엄마의 환영에 갇혀, 평생 왼쪽 길로만 걸어가는 바람에-다른 길로는 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참아내는 것만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참고, 참는 것만이, 다들 자신처럼 힘들 거로 생각하며 참는 것만이. 오른쪽 길도 있다고, 힘들면 쉬어가도 된다고 누군가가 미영에게 알려줬더라면 미영의 인생은 어땠을까?
‘절대’라는 건 없다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안 주면 좋지만, 살아가다 보면 피해를 줄 수도 있다고. 피해를 줬다면 사과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고. 그런 것들을 가르쳐주는 어른이, 단 한 명이라도 그런 어른이, 어린 미영에게 있었다면 미영의 인생은 어땠을까? 영정사진 속에서 조차 웃고 있지 않는 미영의 얼굴을 보며 고단했을 미영의 삶을, 나는 생각했다. 미영 아빠의 이야기를 들으며 거기 있는 우리 모두 아마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집까지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못 걸을 정도도 아니었기에 걸어가기로 했다. 생각이 많아서인지, 생각이 부족해서인지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았다. 복잡한 마음으로 집에 도착한 나는 곧장, 딸의 방으로 향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나모롤 캐릭터의 잠옷을 입고 딸아이는 더없이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나는 딸아이에게 인생을, 삶을 어떻게 살라고, 가르쳐야 할까? 내가 그런 것들을 가르쳐줄 만큼 나는 지금, 잘 사고 있는가? 내가 만약 지금 당장 죽는다면,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나도 미영 엄마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미영엄마도 미영에, 제일 중요한 거 하나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었을텐데... 이런저런 것이 떠올랐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더 나은 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또 나의 말 한마디에 갇혀, 나의 착한 친구 미영처럼 그리 살게 되는 건 아닐지, 염려에 걱정을 더하고, 거기에 두려움을 더하고, 불안까지 더했더니 공포가 되었다. 결국, 삶은 본인 스스로 부딪히며 깨우쳐 사는 것임을, 미영처럼 죽기 바로 직전에 깨달을 수도 있는 거고, 어쩌면 죽을 때까지 길을 못 찾을 수도 있는 거고, 삶은 여러 모습일 수도 있겠구나 인정할 수밖에.
나의 역할은, 여러 길이 있다고, 혹은 길이라는 것이 없을 수도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딸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불현듯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무엇을 해도 좋고, 무엇을 안 해도 좋다.’ 라는 말이 떠올랐다. 잘 기억했다가 내일 딸한테 꼭 말해 줘야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아빠 말이 재밌다는 듯, 킥킥 웃을 딸의 모습이 벌써 눈에 선했다. 딸의 얼굴에서, 나의 친구, 미영 얼굴을 얼핏 본 것 같기도 하다. (끝) 24.1.13


#단편소설 #오디오북 #어떻게살것인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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