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선을 그어 나가는 마음 #01
학부 전공으로부터 시작해 건축 분야에 14년간 몸담았다가 업에 대한 깊은 고민을 안고 돌연 [리틀캐빈클럽]이라는 회고 커뮤니티 브랜드에서 일하게 된 '건축하지 않는 건축사'의 이야기입니다. 60일간의 10분 글쓰기 챌린지에 참여하여 건축업계에 있었을 때의 시선이 담긴 예전의 글들과 지금의 시선을 병치하여 적는 것으로 출발하려 합니다.
창의성을 키우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할 수 있을까?
시간이 없다.
소위 대형 건축사사무소라는 곳에서 건축 설계 일을 하고 있는 나에게 창의성이란 시간과 아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단어로 다가온다. 건축이란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 어떤 것을 만드는 일이니, 창의성까진 아니더라도 창조하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건축이라는 전공을 선택하고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누구든 창의적인 설계를 하고자 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설계사무소에서 설계를 하게 되면 사업성이나 효율성 같은 부차적인(사실은 본질적인) 제약들이 따라붙는다. 게다가 마감이라는 최종 보스가 야근과 철야라는 불구덩이 속에서 시간이라는 채찍을 휘두르는 모습을 마주하며 마감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창의성 따위는 불길에 휩싸여 보이지도 않는다. 시간에 쫓겨 다른 디자인을 차용하거나 소정의 창의성을 같이 포장해서 겨우겨우 마감일을 맞추는 일이 파다하다.
여기서 다른 디자인을 차용하기 위한 밑 작업을 이 업계에서는 사례 조사라고 부르는데, 이른바 다른 이들이 마감이라는 최종 보스를 향해 꾸역꾸역 걸어가서 이루어낸 작업들을 한데 모아다 놓는 일이다. 그중 당해 프로젝트의 디자인에 적용하기 썩 좋거나 어울리는 것을 추린 뒤에 그것들을 합치거나 빼는 일이, 모든 것을 무에서 유로 만드는 일보다는 훨씬 잦다. 그렇게 하다 보면 디자인의 목적과 목표의 근본에 닿기보다 겉치장에만 골몰하게 되기에, 매우 운이 좋다면 사례보다 퀄리티가 좋지만, 보통은 좋은 디자인이 못되어도 그냥 진행시키는 일이 많다.
그 어떠한 시간의 제약도 없는 설계를 상상해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계속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을 좇다가 일이 완성되지조차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것을 창조해내는 일 자체가 적절한 시간의 제약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충분히 만족스러운 설계를 얻어내기 위한 적절한 시간을 정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모두가 물질적으로 풍부하다면 무한한 시간을 제공할지도 모르겠지만, 건축은 큰돈이 들어가는 일이고 그만큼 큰 수익을 창출해야 하기도 하는 일이기에 모두가 시간의 효율성에 대해 예민하게 된다. 자연히 마감 기간은 항상 바쁘고, 그만큼 빠른 시간 안에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만이 창의성이라는 단어가 건축설계업에 있어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빠른 시간 안에 창의성을 발휘한다는 건 말은 쉽지만 실제로 이루어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단어로서의 창의성은 번뜩이는 것이어서 순식간에 일어날 것 같지만, 설계는 그 아이디어를 이미지 한 장으로라도 구현해서 보여주는 데에만 한나절이 걸린다. 아무리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그것이 과연 실현되는지 시도해보는 것조차, 실패하면 다시 해야 한다는 두려움을 이겨낼 가상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이 글은 과연 창의적인 글인가? 게으름을 극복하고 나 자신을 이해하고자 글쓰기 챌린지에 참가하게 되었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한 나의 시간은 야근과 철야로 점철된 일상으로 인해 과연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 짧은 시간 안에 글을 쓰지만 그 안에 어떤 창의성을 담아내는 일은 결국 마감을 극복하고 설계를 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 글에 창의성을 담기 위해 시간의 제약에 관한 불평을 길게 늘어놓았으니 어떻게 창의성을 제고할 것인지 그 방법을 시간의 제약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풀어내야 한다.
사실 오늘은 금요일에 이번 프로젝트의 마감을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 매우 운이 좋게도 매 월요일 저녁의 라틴댄스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와 샤워를 한 뒤 쾌적한 상태로 이 글을 적고 있다. 또 마감을 앞두었지만 지난 주말에는 다행히 출근하지 않을 수 있게 되어, 진작에 잡아두었던 JLPT 시험을 치렀다. 이 모든 것들은 상당히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나는 지금 글을 쓰면서 이번 JLPT 지문에 나왔던 '글쓰기에서 독자를 고려한다는 것의 중요성'이라는 주제를 녹여보려고 상당한 애를 쓰고 있었다. 물론 그 주제는 내가 생각하는 창의성과 별 관계가 없어서 실패했지만, 댄스 수업을 마치고 땀을 흘려 맑아진 정신으로 귀가하면서 역시 지문의 주제를 10분 글쓰기에 넣어보려고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즉, 창의성을 시간의 제약 안에서 발휘하려면 두 가지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의 폭을 넓히고 그 경험을 진지하고 생생하게 받아들이자. 상당히 오랜만에 시험을 치는 일을 하면서 내 머리는 고도의 집중을 하고 있었기에 나는 시험을 친 뒤에 지문의 내용을 기억하고 그것을 이 글에 집어넣어 보겠다는 어쭙잖은 목표를 잡아볼 수 있다. 일본어 시험이라는 다소 특이한 경험을 하지 않으면, 글쓰기에 관한 아티클 같은 것을 접할 일은 없었을 일상이기에, 이런 경험을 글에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단어 하나하나가 버거울 만큼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읽으니 진지하고 생생한 경험이 되고, 이 경험을 꼭 글에 적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해당 분야의 사람들 모두가 하는 경험을 똑같이 해서는 창의성이 발현될 리 없고, 똑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그 경험에 대해 느끼는 정도에 따라 창의성은 발현될지 모른다. 경험의 축적이 없으면 창의성을 위한 시도 자체가 없다.
둘째, 일상에서 창의성을 발휘할 분야에 대해 종종 생각하자. 평상시에 얻은 경험을 창의성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그 경험을 창의성을 발휘할 분야와 연관 짓는 사고가 꼭 있어야 한다. 이걸 꼭 써먹어야지 하는 마음이란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무한히 경험만 축적하는 것으로는 경험은 언젠가 기억의 저편으로 흘러가버리므로 창조의 과정과 연관 짓지 못한 채 아깝게 사라져버릴 수 있다. 평상시에 창의성을 발휘할 분야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하면, 순간의 경험은 사라지지 않고 하나의 아이디어가 될지도 모른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면 당연히 어딘가 기록하게 되고, 그러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기 전에 소중한 경험으로서 축적된다. 그렇게 축적된 경험은 그냥 경험보다 머릿속에 번뜩이기 쉽다.
창의성에 관해 생각하다가 하루 10분 생각하는 글쓰기인데 10분을 훌쩍 넘어버렸다. 내가 만연체라는 것을 크게 깨달았다. 지루한 것은 창의적이지 않다. 주제를 간결하고 명확하게 전달하는 글을 쓰고 싶다.
시간도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다시 창의성은 시간과의 싸움
다시 시간이 없다.
이제야 몸소 느끼게 된 사실이지만, 비단 건축뿐만이 아니라 모든 직장인은 창의성을 요구받는다. 새 직장인 리틀캐빈클럽에서는 현재까지 'Make.com을 통한 업무 자동화'와 유일한 홍보 채널인 '인스타그램 콘텐츠 개편'을 새로운 직무로 부여받았다. 둘 다 처음 해보는 업무임은 당연하지만, 막상 창의성을 요구받을 것 같지 않은 자동화에서조차 어느 정도의 창의성은 필요하다.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를 통해 들어오는 모든 데이터의 형식에 대해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해도 바티(주로 자동화 작업이 외국계 기반이어서 접근이 어려운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데이터를 쉽게 구글 시트로 가져올 수 있도록 설계된 국내 업체)를 통해 데이터를 구하면 그 결과가 스마트스토어 관리자 사이트를 통해 구할 수 있는 데이터에서 살짝 형식이 변형되어 들어오기 때문에 알기 어렵다. 게다가 아직 주문 데이터가 많지도 않기 때문에 데이터가 들어오는 형태의 경우의 수를 다 알지 못하고 자동화 작업을 먼저 시작한 터라 특수한 케이스가 발생할 때마다 자동화를 수정해야 한다. 아직 간단한 작업이고 에러가 나더라도 엄청난 불행이 있지 않지만, 데이터의 경우의 수에 대해 조금만 더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었더라면(아니, 그저 기본적인 이해가 있었더라면) 실수나 오류가 줄어들었을 것이다.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확인하고 수정하는 과정이 모두 시간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홍보 콘텐츠 기획 역시 마찬가지다. 소비자, 감상자로서 바라보는 콘텐츠와 제작을 염두에 두고 바라본 콘텐츠는 품의 차이가 너무 다르다. 무수히 쏟아지는 인스타 콘텐츠 중에서 잠재적 수요자의 눈에 띄어야 하는 데다, '한 주에 몇 개'라는 식으로 올릴 분량까지 확보되어야 노출될 가능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콘텐츠를 업로드 할 계획을 담은 노션 캘린더를 미리 한 달 단위로 짜고 나서 디테일한 포스팅에 들어가게 된다. 또 디자이너의 후작업을 전제로 기획이 시작되므로 컨셉 구상을 넘어 디테일한 텍스트나 이미지 구상까지가 며칠 앞서 이미 완료되어야 한다.
콘텐츠 자체의 창의성도 문제다. 나의 개인으로서의 관심과 브랜드의 소비자 페르소나 사이의 교집합을 넓혀 나가야 함과 동시에 콘텐츠의 무게감까지 브랜드의 이미지와 교차하는 범위 안에서 설정해야 한다. 거기다 다른 콘텐츠에서는 아직 제작하지 않았는지를 고려하거나, 오히려 이미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있어서 따라 할 때에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밈 같은 것들까지 고려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것이 액션으로 이어지도록 할 콘텐츠 별 CTA와 그 결과가 유의미한지 통계를 확인하며 방향을 조정하는데, 이 모든 것을 주어진 인간의 시간 안에서 해낸다는 게 익숙하지 않은 입장에서 까마득하기도 하다.
그러나 건축일을 하며 느꼈던 창의성을 위해 필연적인 2가지 바탕 작업과 그것을 위한 내 이전의 노력들은 지금 업무에서도 여전히 의미는 있다. 일상 경험의 폭을 넓히고, 그것을 어떻게 해당 분야에 적용할지를 고민하는 것, 어쩌면 마케팅 분야에서는 당연한 일인 것 같다. 하지만 분야가 다르다 보니 과연 나와 브랜드가 함께 조정해 나갈 우리 사이의 교집합이 얼마나 내 쪽으로 끌어당겨질지, 끌어당길 수 있을지가 앞으로 신경써야 할 포인트다. 그리고 자동화와 마케팅은 또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빠르게 업무 전환을 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도(건축에서의 실무는 다소 진득한 면이 있어서 업무 전환보다는 몰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커다란 숙제로 남아있다.
브런치에 글을 적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 모든 창의성이 속도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으로 별도의 브런치북을 통해 본격적으로 발행할 나름대로 전문적인 글과 비교할 때, 일상에서의 감상과 인사이트 정도를 쓰는 이번과 같은 글에서는 분량과 속도 조절을 새롭게 설정해야겠다.
여전히 시간도 없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