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마음이 머무는 곳들 #01
어떤 그림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어떤 그림보다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림은, 실제로 미술관에서 본 적이 없는 그림들이었다. 그저 우연한 기회로 어딘가 미술관에서 그 이미지의 엽서를 보았을 뿐인데, 그 장소 또한 기억이 나지 않으니 꼭 실물을 봐야 그림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창백할 정도로 장식과 형태가 결여되어 있지만 어딘가 따듯한 느낌을 주는 웜톤의 색감. 붉은 기가 없어 시간 감각이 없지만 그럼에도 편안하게 느껴지는 자연광이 물건이 많지 않은 미니멀한 공간을 감싸고 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은 지금 피아노를 치고 있지만 전등을 킬 이유는 없는, 집을 형형색색의 꽃이나 화려한 벽지로 장식할 필요가 없는, 말하자면 혼자 있는 사람이다. 그림을 마주친 순간, 바로 그 장면의 속에 내가 놓여 영원히 갇혀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독할 정도의 고독, 하지만 익숙하고 편안한 고독. 나는 이 그림을 보면 안락함을 느낀다.
이후에 'piano / woman / house / painting' 과 같은 단어로 몇 번이고 검색해서 알아낸 이 그림은 빌헬름 함메르쇼이라는 덴마크 작가의 그림이었다. 유명하지 않은 그림이라 찾을 방도가 없으리라 여겼던 이 그림은 웬걸, 덴마크 미술품 경매 역사상 가장 비싸게 팔린 작가의 그림 중 하나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오랫동안 갖고 있었던 이 그림에 대한 나의 애정은 한 절반 정도로는 줄어들었다. 안락함이란 돈이 있어야 살 수 있구나를 또 한 번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었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라, 이런 칙칙한 안락함을 모두가 고평가 할 것이라고는 누가 알았겠는가. 당연히 내가 정말 우연한 기회로 얻게 되어 운이 좋았다고 여겼던, 나만의 특별한 안락함이라고 여겼던 것이 실은 가장 비싼 가격이 매겨질 정도로 너무나 흔하고도 모두가 느낄 수 있을 안락함이었구나. 결국 내 휴대전화 바탕화면이었던 이 그림은 다른 사진으로 대체되었다.
한동안 회화를 보고 특별한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나는 어쩌다 예전에 사두었던 재일교포 작가 서경식 씨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라는 오래된 베스트셀러를 집어 들었고, 벨라스케스의 작품에 대한 소개를 받았다. 그리고 읽어가는 와중, 벨라스케스는 의도적으로 난쟁이나 광대의 그림을 그리곤 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놀랍게도 당대의 귀족들은 난쟁이나 다모증 환자 같은 장애인을 데리고 다니면서 비장애인인 자신들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를 위해 꾀죄죄한 옷을 입히고 자신들을 대신해 매를 맞게 하는 등의 학대를 일삼았단다.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시녀들'이라는 작품에도 시녀와 난쟁이가 등장한다. 익숙했던 '시녀들'과 앞의 설명이 나오고 있어 '음, 그런가 보다'하고 보다가 다음 장에서 마주친 초상화와 눈이 마주친 순간을 잊기 어렵다.
당시의 실제 난쟁이들과 달리 이 난쟁이는 화려한 옷을 입고, 다소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x-men 등의 마블 영화에서 알게 된 배우 피터 딘클리지를 떠오르게 하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의 압도적인 연기를 보았을 때처럼 이 그림을 보고 움츠러들었다. 당시 난쟁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자신들을 외적으로 돋보이게 한다는 썩어빠진 정신을 가지고 있던 귀족사회를 비판하려는 심산으로 그려진 그림이기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각심을 바짝 일으키는 그림이기도 한 것이다. '예술이란 단순히 아름다운 것들을(어쩌면 안락한 것들을) 묘사하고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렇게 자신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구나'하고 팔꿈치 관절의 신경을 의자에 찌인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후 나는 저 그림을 프로필 사진에 걸고, 자주 그림을 마주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를 즐겼다. 그러나 매일매일 자신에게 경각심을 일으키는 일은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다. 효과가 미미해져서가 아니라, 경각심 자체가 주는 피로를 견디기에 나라는 인간이 너무 나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에는 이 그림에 대해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이런 생각으로 이런 그림을 걸었다는 것을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경각심 없는 행동(좋게 말해 실수)을 해버렸다. 나는 프로필 사진에서 그림을 내렸고, 이 그림을 찾아보는 일도 적어졌다. 어쩌면 이 그림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바를 다른 이에게 말할 때의 지적 허영과 귀족들이 난쟁이를 데리고 다니는 물적 허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라스케스는 나를 '카톡 프로필을 바꾸며 킬킬대는 음흉한 인간'으로 그렸을지도 모른다.
나의 mbti 검사 결과는 INFP로, '열정적인 중재자'다. 중재는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INFP에 관한 많은 짤들 중에는 모순적인 것들이 많다. 기억에 남는 것은 영어로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 하면 INFP들이 '와~', '세상에 불만이 가득한 사람?' 하면 또 '와~' 하다가, '세상을 바꾸러 나올 사람?' 하면 INFP들이 조용해지는 짤이다. 그러니까 벨라스케스 그림과 같은 세상에 대해 전복적인 그림을 보고 감탄하고 경도되는 한편, 사실은 빌헬름 그림과 같이 집에서 고독을 즐기며 넷칠하고 싶은 마음이 내게는 늘 공존한다. 어떤 그림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특별한 계기 때문도 아니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한번 좋아진 그림은 나를 어떻게든 설명해 준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이 그림들을 좋아하게 된 이유에 대해 나는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이 그림들이 내가 나에 관해 길게 설명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좋은 것은 아닐까. 이 그림들을 만나고 좋아할 수 있게 되어 참 다행이었다.
땅에 바짝 가까운 그림
지난 글로부터 4-5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그 이전의 학생시절의 4-5년만큼이나 무수한 이미지들에 시달려 왔다. 어떤 대상을 의지를 갖고 곰곰이 생각하며 바라본다는 것은 엄청나게 피로한 일이다. 부정적이거나 상업적인, 그러니까 대부분의 이미지는 나에게 어떤 것을 강요하기 위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피로하다. 그런 이미지의 양이 많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의도하지 않아도 SNS, 전광판, OTT 등을 통해 어쩔 수 없이 노출되기 때문에 또한 피로하다.
실무에서의 건축 이미지는 더더욱 피로하다. 건축은 그 자체로 광고이자 상품이며, 이미 만든 다음에 보여주기보다는 이렇게 만들 것이라고 보여주며 설득하는 대상이기에, 건축인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은 대부분 가상을 광고하는 것들이다. 게다가 공공건축의 경우는 정치와 행정가들이 원하는 '내세울만한' 이미지를, 민간 건축의 경우는 건축주가 원하는 '팔릴 것 같은' 이미지를 요구받고 의도하기에 많은 경우 소위 '눈뽕'이 된다.
건축 분야 종사자로서 그런 이미지 지옥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마음은 그래서 당연했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눈을 높이기 위해 미술관과 갤러리를 찾았던 나는, '내세울 만한'과 '팔릴 것 같은'의 언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기술 친화적인 현대 미술의 '휘황찬란함'과 'AI 스러움'을 멀리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자꾸만 이전으로 시절을 거슬러 돌아가려고 하고 보다 차분한 것을 찾게 되었다. 그러니 결국 미술에서 다시금 '안락함'을 찾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안락하기만 하지는 않고 익숙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경각심'이 드는 그림이어야 좋아하는 그림이라고 설명할 수 있음을 또한 알게 되었기에, 나는 둘을 동시에 찾아다니게 되었다.
휴양지라고 생각되어 평소엔 잘 인지하지 못하지만 억척스러운 자연환경과 그보다 더 비참했던 역사가 오버랩되는 곳, 우리나라에서 제주도만큼 그런 지역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번에 좋아하는 그림을 떠올려 보니 가장 먼저 떠오른 그림은 바로 제주에서 태어난 서양화가 강요배의 '마파람Ⅰ'이다. 이 그림을 기억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에 있다. 대중 매체로서 사진은 카메라로 찍지만 인간의 시각이 전제이므로 주로 사람이 익숙하게 보는 것들로 세상을 담는다. 그런데 카메라로도 찍기 어려울 만큼 낮은 곳에서, 카메라를 바닥에 던져 우연히 나온 것처럼 응당 일렬로 있어야 마땅한 옥수수들의 축이 비틀어져 있는 모습을 담은 이 그림을 보니 '도대체 왜 이렇게 그렸을까'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그림에서는 도저히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안락함'과 '경각심'이 번갈아 느껴진다. 네발로 기는 동물의 시선을 표현한 것이 아닌 이상, 이런 각도로 하늘을 바라보려면 엎드려 고개를 치들거나 바닥에 비스듬히 누워야 한다. 그러니 이 그림은 몸이 땅에 바짝 붙어 자연과 가장 가까워진, 물리적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심적으로는 인간이 돌아갈 곳인 자연으로 돌아간 듯한 '안락한' 상태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그러나 해는 저물고 있고, 제목을 굳이 보지 않아도 연상되듯이 하늘에는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옥수수들은 휘휘 방향을 바꿔가며 잎을 서로 부딪히며 유난을 떨고 있어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경각심'이 든다. 그런데 또 직접 보이지 않는 해는 저물지만 그 빛은 유난히 아련한 빛으로 인간 보편이 차분하고 잠잠해지는 그 시간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옥수수의 상태로 보아 그리 춥지만은 않은 계절감과 옥수수밭이 가까이 있는 사람이 사는 동네라는 안도감이 다시 '안락함'을 준다.
풍경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마음에 드는 순간과 구도를 잡기 위해 하루를 다 바쳐 자연을 누비며 돌아다니듯, 강요배 작가도 그려서 표현하고 싶은 제주의 느낌을 담기 위해 그리했을 성싶다. 그러다 보면 몸은 흙먼지투성이가 되고, 자연이 난지 내가 자연인지 헷갈리는 상태에 도달하게 될 테다. 그 정도가 되면 바위에 머리를 기대어 누워도 보고 옆으로 누워 눈도 붙이고, 높은 곳에 올라가려 네발로 기어도 봤을지 모른다. 두 발로 반듯이 서서 바라보는 세상과 표현하고자 하는 풍경을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땅에 가까워진 사람이 보는 세상은 엄청난 의미와 수준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두 발로 반듯이 서서 미술관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도록 베풀어주시는 작가의 마음과 의도에서 서울 한복판의 밥상머리에도 각종 해산물을 올릴 수 있도록 베풀어주는 제주 자연과 해녀의 마음까지 연상되려고 하는 건, 내가 너무 이 그림에 빠진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