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실에서 만난 기자, 그러니까 내 옛 모습
어떤 직업은 단순한 생계 수단을 넘어 한 사람의 정체성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런 직업을 한번 가졌던 사람은 평생 그 직업이 남긴 그림자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열 해 넘게 기자로 살았다. 취재 현장을 뛰어다니며 진실을 좇던 나날들, 마감에 쫓기며 키보드를 두드리던 밤들, 세상에 알려야 할 이야기를 찾아 헤매던 시간들. 그 모든 것들이 내 몸과 마음에 각인되어 있다. 마치 오랜 시간 바다를 떠돌던 사람의 몸에서 파도 소리가 들리듯 나의 일상에서는 여전히 취재 현장의 소음이 들려온다.
작년 이맘때, 나는 홍보기획자라는 새로운 길을 택했다. 마흔이라는 나이가 주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변화를 갈망하는 내면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그때의 나는 기자라는 옷을 벗고 새로운 옷을 입으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취재하는 버릇, 질문하는 습관, 현장을 파고드는 본능은 내 몸에 깊이 새겨진 각인과도 같았다. 홍보기획자로서 반만 쓰면 될 능력을, 나는 늘 백 퍼센트 쓰고자 했다. 마치 사막에서 바다를 그리워하는 물고기처럼 나는 끊임없이 더 깊은 물을 찾아 헤맸다.
어느 날 문득, 회의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왜 나는 이토록 불완전한 걸까. 새로운 길을 선택했으면서도 옛 길을 그리워하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 그때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기자였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기자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만난 옛 동료들과의 자리에서 나는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나를 다시 만났다. 그들과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마치 오래된 거울을 들여다보듯 진짜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건 단순히 직업의 문제가 아니었다. 존재의 문제였다. 나는 기자로서 살 때 가장 나다웠고, 가장 충만했으며, 가장 진실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마흔이 넘어 옛 직업을 그리워하는 건 미성숙한 징후라고.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그리워하는 일이 어떻게 미성숙할 수 있느냐고.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가장 성숙한 자기 인식이 아닐까.
이제 나는 안다.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것은 단순히 기자라는 직함이 아니라는 것을. 그건 진실을 향한 갈망이고, 세상의 이야기를 올곧게 전하고 싶은 열망이며, 내 안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는 사명감이다. 그것들은 마치 오랜 연인처럼 내가 잠시 등을 돌리고 있을 때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자는 내가 '했던' 직업이 아니라 나를 '만든' 정체성이었음을.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숙명 같은 소명이 있는지도 모른다. 잠시 잊고 살 수는 있어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런 내면의 목소리. 나에게 그것은 바로 '기자'였다. 그리고 이제야 나는 그 진정한 나의 길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