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lever Nov 03. 2022

웹툰 작가 ‘닥터 베르’는 일상이 소중하다

좋아하는 걸 하며 사는 인생에 관하여

‘고수의 생각’은 고수의 철학, 나아가 그들이 사고하는 방법을 뜻합니다. 즉, 각 분야 고수들의 사고법을 배워 우리네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게 이 인터뷰 기획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으면 살면서 마주하는 생각의 지평이 넓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인터뷰에는 단순 신변잡기보다는 고수의 생각이 담깁니다.




공학박사 학위를 코앞에 두고 트램펄린에서 떨어져 전신마비가 될 뻔한 상황을 맞았지만 좌절하기보다 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고, 그렇게 선택한 것이 웹툰 작가다. 그는 웹툰을 그리며 성취감을 맛보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작가는 2019년 9월 1일, 네이버 웹툰에 <닥터앤닥터 육아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영화 속 대사를 패러디해 기가 막힌 타이밍에 치고 들어오는 센스와 공학도나 알법한 용어를 개그로 승화시킨 유머 감각, 일상을 담담하게 나열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찡한 공감을 일으킨다.


서울대 공학박사 출신, 본명은 이대양, ‘닥터 베르’라는 필명으로 활동 중인 웹툰 작가. 그가 육아 웹툰을 하게 된 건 박사 학위 준비 도중 돌연 3년간 육아휴직을 내고 육아에 전념했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그는 2019년 공학박사 학위를 받자마자 웹툰 작가로 데뷔했다.


무언가를 익히고 배우며 성취를 거두는  즐거운 인생을 사는 방법인  같다는 그의 말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21세기형 르네상스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돌연 림프종 4기 판정을 받은 이 작가는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한 번의 지각, 휴재 없이 웹툰을 완결했다. '언제나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뭘까 고민하고 행동한다'는 삶의 철칙을 이어간 그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내면서, 그 강인한 정신력에 관해 나눈 대화를 공개한다.


Profile 닥터베르(이대양)

네이버 웹툰 <닥터앤닥터 육아일기> 연재

서울대학교 대학원 에너지시스템공학 박사




일상을 소재로 하는 웹툰은 양날의 검이다.
작가의 경험이 많으면 소재 발굴의 고통은 별로 없다.
하지만 소재가 고갈되면 작품의 생명도 끝나버리는 거다.
그때부터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늘어나면서 독자에게 외면당한다.

그래서 얼마나 오랫동안 끌고 갈 수 있을지를
충분히 고민한 다음에 시작하는 게 좋다.
다행히 나는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많았던 터라
앞으로 몇 년은 문제없을 것이다.



웹툰을 그리게 된 계기가 있나요?

지난 2015년 아이가 태어나면서 박사과정을 중간에 멈추고 3년간 육아휴직에 들어갔어요. 아내보다 힘이 세고 아이 돌보는 걸 잘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죠. 그런데 2017년 아이와 트램펄린을 타고 놀다가 잘못 떨어져 경추 7번부터 흉추 3번까지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했어요. 당시 오른팔과 머리를 빼고는 거의 전신을 움직이지 못했어요. 그때 최악의 경우 오른팔로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웹툰 작가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고, 그림 그리는 걸 즐겼기 때문에 시도해보기로 마음먹었죠.  


육아에 전념하겠다고 했을 때 아내의 반응은요?

처음부터 둘이 논의한 끝에 내린 결론이라 큰 마찰은 없었어요. 우리가 직접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고, 현실적인 조건을 고려할 때 내가 휴직하는 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만화에도 나오지만 아이 보는 데에 재능이 있었습니다.(웃음) 오히려 아내보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더 냉소적이었던 것 같아요. 다들 이 핑계로 ‘셔터맨’이 되는 거 아니냐고 했어요.  


전혀 새로운 분야였는데, 두렵지는 않았나요?  

자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고민도 많았어요. 하지만 현실은 꿈과 희망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딱 1년만 해보자고 결심한 거예요. 다행히 내 웹툰에 대한 반응이 나쁘지 않아 확신을 갖게 됐어요.  


연구원을 그만두고 아예 웹툰 작가로 전업한 이유가 있어요?  

다행히 건강을 회복해서 육아휴직을 끝낸 후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하지만 그때부터 가야 할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보통은 학위 직전 3년의 연구 성과 등으로 실력을 평가받는데, 제 경우 그 3년 동안 육아휴직을 한 거예요. 학교에 남아 3년의 공백을 메울 연구를 할 것인가, 다른 길을 갈 것인가를 고민하다 결국 웹툰을 택했어요. 박사로서 연구에 몰두하는 삶을 택하기에는 가족이 갖는 의미가 내겐 너무 컸어요. 연구원의 바쁜 삶보다 일과 가정생활을 양립할 수 있는 길을 택하고 싶었습니다. 집에서 작업할 수 있는 웹툰이 바로 그런 길이었어요.


도전하는 용기가 대단하네요

공학박사 생활을 완전히 접은 건 아니에요. 보통은 학위를 받으면 전공 분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박사 학위를 ‘방법론’이라고 생각해요. 정보를 찾고, 믿을 만한 정보를 추리고, 그것을 모방하는 방법을 익히고, 거기서 개선점을 찾는 등 연구의 방법론 같은 거요.


이렇게 정보 검색을 바탕으로 하는 저의 연구 능력은 웹툰을 그리는 데 잘 활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산부인과 의사인 아내가 의학 논문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면 그걸 만화에 유용한 정보로 활용해 추려 넣는 것이죠. 뭘 하든 활용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물론 그러기 위해 박사 학위를 딴 건 아니지만.(웃음)  


웹툰 그리겠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어요?

이전에 사고로 인한 부상이 가족에게 워낙 큰 충격이었는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적극 응원해줬어요. 오히려 연구실 동료들이 난리였어요.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다 네이버 웹툰에 입성하고 나서는 축하를 많이 받았습니다. 지도교수님도 “너는 어디를 가든 밥은 안 굶겠다 싶었는데, 정말 예상치 못한 곳으로 가는구나”라면서 축하해줬어요. 이후 연구실 후배 중 하나도 트위치 TV라는 개인 방송을 시작했는데, 뭔가 내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웃음)


웹툰 소재를 육아로 정한 이유는 뭐예요?  

처음 그린 건 가장 자신 있는 물리 학습 만화였어요. 그런데 별 반응이 없어서 4개월 만에 내렸어요. 다음 소재를 고민하던 중 아내가 이왕이면 많은 사람의 관심과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육아가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실제로 육아 경험도 많았고, 산부인과 전문의인 아내의 조언도 받을 수 있으니 괜찮겠다 싶어 <닥터앤닥터 육아일기>를 시작하게 됐다. ‘산부인과 의사 엄마와 공학박사 아빠의 육아일기’라는 의미로 ‘닥터앤닥터’를 타이틀에 넣었다.


공감을 얻는 스토리를 뽑는 노하우가 있다면요?

일상이라는 게 어찌 될지 모르는 거예요.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 일로 인해 다른 일이 또 벌어지고, 그게 상황이나 사람을 바꾸기도 하고…. 그런 맥락이 이야기에 갖춰져 있어야 해요. ‘아, 이런 일이 있어서 이렇게 됐구나’, ‘저래서 이 사람이 그런 결정을 했구나’ 같이 사람들이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결국 이야기라는 건 기승전결이죠. 그 매뉴얼에 맞춰 스토리를 구성합니다.  


스케줄은 어떻게 관리하나요?  

마감을 지키는 일이 우선이예요. 공휴일이고 명절이고 마감은 봐주지 않기 때문이죠. 매주 두 번 연재하는데, 이를 위해 주 6일간 매일 10시간 정도씩 그림을 그립니다. 작업량이 많은 편이지만 집에서 일하니 출퇴근 시간을 아낄 수 있고, 원하는 시간에 집중해서 일할 수 있으니까 나름 여가 시간도 챙길 수 있어요. 하루 1시간 정도 운동도 하고, 주 1~2일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요.  


좋아하는 만화 스타일은요?

주인공이 역경을 이겨내며 노력하는 고군분투기 같은 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노력한 만큼 보답받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주인공이 노력한 만큼 보답받는 이야기를 보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답니다. 그래서 스포츠물을 특히 좋아해요.


노력과 보상은 항상 같이 온다고 생각하나요?  

노력과 보상의 양이 비슷하거나 보상이 살짝 높은 정도가 제일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노력 대비 보상이 너무 크면 그건 요행이죠. 평생 그런 것만 기대하게 만들 거예요. 반대로 노력이 큰데 보상이 적으면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죠. 웹툰을 놓고 보면 내 노력이 보상받는 순간을 위해 노력을 반복하는 것, 그게 내 삶의 원동력이에요.



아이에게는 어떤 아빠인가요?  

맥가이버 같은 아빠라고 생각합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가르쳐주고, 망가진 게 있으면 고쳐주고, 뭐든 잘 만들어주는 아빠. 아빠가 슈퍼맨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니까, 그동안 최선을 다 하려고 해요. 너무 열심히 했는지 몇 달 전에는 아들이 “아빠, 이 멋진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어요?”라고 묻더라고요. 그때 내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느꼈습니다. 아들이 계속 이 멋진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가장 영향을 받은 웹툰 작가는 누구예요?  

성공적인 작품의 조건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스파드 작가의 연출, 배진수 작가의 아이디어, 쇼쇼 작가의 공감 능력이 합쳐지면 그 작품은 실패하기가 더 어려울 거예요. 웹툰은 빠르게 생산되고 소비되기 때문에 본인의 강점을 얼마나 빠르게 잘 드러내느냐가 중요한 요소 같아요. 그런 점에서 세 작가의 작품은 지금도 내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요?

국립중앙도서관에 ‘국제표준이름식별자(ISNI)’라는 게 있어요. 문학, 학술, 음악, 미술, 영화, 방송 등 모든 창작 분야의 개인과 단체에 부여하는 열여섯 자리 숫자로 이루어진 식별자입니다.


동명이인이 많기 때문에 창작자들에게 번호를 부여해서 구분하는 것이죠. 저도 ISNI가 있는데, 현재 연구원, 작가, 만화가로 등록되어 있어요. 거기에 4~5개를 덧붙이는 것이 목표예요. 작사가, 작곡가, 시인 등 아직은 뭘 덧붙일지 구체화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가장 긴 ISNI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게 목표입니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을 보면 식물학자이면서 조각가이면서 화가였고 학자였어요. 제 인생을 르네상스 시대처럼 살다 가고 싶어요.(웃음)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앞에 니체를 소환한 철학자 이진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