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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문을 열고 포착한 백제와 일본의 만남

영산강 유역의 왜계석실 (榮山江 流域의 倭系石室)



부산대학교 고고학과 4단계 BK21

동아시아 SAP 융합 인재 양성 사업팀

한한철 (석사과정, 참여대학원생) 



  고대인들의 무덤(분묘)은 오늘날 고고학자의 손을 거쳐 역사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감춰져 있었지만 이제 박물관, 현장을 통해 우리에게 한 발 더 다가서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무덤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 구조가 어떠하며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한반도 왜계석실의 분포도 (김규운, 2017)


  삼국시대의 영산강 유역*에는 일본의 고분과 유사한 외형, 내부구조를 가진 횡혈식석실(왜계석실**)들이 분포하고 있어 이를 둘러싼 당시의 국제관계는 학계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고분의 주인공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대 사회의 많은 비밀들이 문 너머에 담겨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석실의 문을 함께 열어보고자 합니다.


* 영산강 유역 : 전라남도 담양군 용추봉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흐르는 강이다. 유역에 넓은 평야지대와 구릉지가 펼쳐져, 장기간에 걸쳐 주거지와 고분이 조성되었다.

** 왜계석실 : 과거 일본열도의 고대인들과 그들의 사회는 ‘왜인(倭人)’, ‘왜’라고 파악할 수 있다. 



고분의 구조


  과거 및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무덤을 ‘고분(古墳)’이라고 합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흙을 쌓아 올려 만든 무덤(墳)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분의 구조는 시신을 묻는 방식에 따라 크게 구덩식(수혈식)과 굴식(횡혈식)으로 나뉩니다.

  수혈식은 시신을 위에서 밑으로 내려 매장하는 구조로, 나무 또는 돌 등으로 시신과 물건들을 안치할 공간(널·덧널, 관·곽)을 만든 뒤 뚜껑을 덮고 그 위에 흙 또는 돌을 이용해 밀봉하는 것입니다. 시신이 있는 공간 위를 완전히 덮어버리기 때문에, 한 번의 매장을 끝으로 다른 사람을 추가로 매장하지 못합니다.

  이에 비해 횡혈식은 무덤의 측면에 입구를 설치하며, 입구를 열고 닫을 수 있어 한 번의 매장 이후에도 반복해서 시신을 무덤에 넣을 수 있습니다. 시신은 무덤의 입구를 통해 옆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돌로 만들어진 방을 사용하여 횡혈식 석실이라고 부릅니다.

(좌) 수혈식석곽묘 (동래 복천동 21·22호분, 가야) : 땅 아래로 구덩이(수혈)을 판 뒤 바닥에 시신과 부장품을 둔 후, 뚜껑돌로 닫고 흙을 덮어 밀봉하였다.
 (우) 횡혈식석실묘 (부여 능산리 東1호분) : 시신은 옆을 통해 들어가 통로(연도)를 거쳐 무덤방(현실)에 놓인다. 문을 열고 닫으며 시신을 추가로 매장할 수 있다. 육각형의 벽, 넓은 면적을 가진 돌로 벽을 조립한 점에서 왜계 석실과 차이를 보인다.


  추가장이 가능한 점에서 횡혈식과 유사한 앞트기식(횡구식)이 있지만, 이 두 가지의 방법은 무덤방(현실)으로 들어가는 통로(연도)의 유무로 구분됩니다. 횡구식석실은 연도가 없이 입구만 설치되는데, 그러므로 추가적인 매장을 행할 때도 별도의 연도를 두지 않고 한쪽 벽면을 사용하게 됩니다.

  고대 중국, 한국, 일본은 각각 시기 차이는 있지만, 모두 수혈식에서 횡혈식으로의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영산강 유역의 왜계 석실


  왜계 석실은 5~6세기에 등장하는, 왜계 요소가 반영된 한반도의 횡혈식석실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왜계 요소로는 사다리꼴 벽 구조, 벽 하단의 대형 판석, 주칠(朱漆), 선반시설, 현문시설 등이 있고 이들 특징으로 인해 한반도의 석실과 구분됩니다. 오히려 이러한 구조는 일본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 석실 중 일부는 일본에서 먼저 축조된 전방후원분과 외형이 거의 유사합니다. 고분의 언덕 주위로 원통형의 토기를 배치한 점도 일치합니다.

왜계석실 (해남 월송리 조산고분)
왜계석실에서 볼 수 있는 왜계 요소


  고분의 외형을 볼 때, ‘전방후원’이란 앞쪽은 사다리꼴, 뒤쪽은 둥근 형태를 의미합니다. 다만 일본의 전형적인 형태에 비해, 한반도의 경우 각 단의 경계에 평탄면이 없고, 고분의 허리부에서 튀어나와 제사를 진행하는 장소로 마련한 돌출부가 없으며, 원통형 토기의 제작 기법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한반도의 고분을 일본의 전형적인 고분과 구분하여 ‘전방후원형 고분’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사실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왜계 문물들이 다수 확인되어 가까운 일본과의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의 요소가 포함된 석실이 본격적으로 출현하는 6세기 이후부터는 일본인이 사용했던 무덤이 한반도에서 등장한 것으로 이들 고분의 주인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좌) 일본의 전방후원분 (우) 원통형 토기 (광주 월계동)


왜계 석실의 피장자는 누구인가?

① 영산강 유역의 한반도 주민 

② 일본열도에서 건너온 왜인

③ 일본에 거주했던 백제 관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사실, 한반도와 왜의 무덤 구조가 온전히 일치하지 않아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전방후원형 고분 내에 축조된 석실은 깬돌로 쌓은 벽 구조, 벽 하단의 대형 판석, 연도와 현실 사이의 현문시설 등에서 백제 중앙의 고분들과 구분되며, 일본 규슈(九州)지방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왜계석실의 의의


  한반도의 왜계석실과 그 분포는 바닷길을 통한 일본열도와의 연결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들이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백제와 왜의 긴밀한 교류라고 생각됩니다. 일본에서 횡혈식석실이 등장하는 배경 역시 백제의 영향으로 생각되며, 기내(畿內)지역에서 횡혈식석실이 등장할 때 쯤 건물지, 토기, 금공품 등에서도 백제의 영향으로 생각되는 자료들이 확인됩니다. 백제와 기내를 연결하는 규슈의 에다후다야마(江田船山) 고분에서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귀걸이와 같은 제작방법으로 만들어진 장신구와 백제산 철제 마구(馬具)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당시 백제 중앙 정부와 일본 기내의 야마토 정권은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규슈지역은 이들 사이에서 활발히 이루어지는 교류의 중심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백제는 오경박사를 파견하는 등 선진 문물을 보내고, 야마토 정권은 그 대가로 군사와 말을 비롯한 인적, 물적 자원을 제공하였습니다. 또한 왕족 간의 외교 속에서 일본의 중앙귀족이 한반도에 도움을 주었고, 그러한 외교의 결과로 왜계 석실, 전방후원형 고분이 등장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비밀의 문을 열고 포착하다


  왜계석실은 그 특징에 있어 백제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다른 무덤들과도 구별되는 독특한 색깔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산강 유역뿐만 아니라 가야권역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바다를 통해 이어진 교류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사천지역의 경우 진주시내가 위치한 남강 하류지역에서 해상으로 진출하는 최단거리 루트로 교역의 중심지였습니다.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꾸준한 교역 속에서 일본의 문화가 들어오는 양상이 짐작됩니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발굴되는 왜계석실은 백제와 일본의 만남, 그 증거를 석실의 문 뒤에 감추어두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배움을 위해 그 문을 두드려보고자 합니다.



□ 참고문헌 

김규운, 2017, 「고분으로 본 6세기 전후 백제와 왜 관계」, 『한일관계

사연구』 58

김준식, 2022, 「왜계 석실 연구의 새로운 접근」, 『삼국시대 고고학의 

새로운 접근』, 제133회 부산고고학회 정기학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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