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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옛 문화로 건너는 다리



부산대학교 고고학과 4단계 BK21

동아시아 SAP 융합 인재 양성 사업팀

나상현 (석사과정, 참여대학원생) 



  성(城)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무엇을 떠올리시나요?

АВТОЭЛЕКТРИК (https://auto-el-86.ru/fortress.html)


  많은 분들은 영상매체를 통해 위와 같은 중세시대 유럽의 성 이미지를 떠올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니면 삼국시대 고구려 안시성이나 수원에 있는 조선시대 화성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저렇게 돌로 쌓은 성 이외에도 많은 종류의 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성(성곽)은 기본적으로는 외부의 적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만든 방어시설로, 오래전부터 성 안에 거주하는 사람과 시설을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또한, 전쟁을 할 때는 적은 수의 사람으로 많은 적에 대항해 살아남기에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습니다. 성곽은 사회가 발전할수록 외부로부터 내부집단을 보호하기 위해 그 형태와 기능, 구조가 더욱 체계화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해 성을 짓기도 하고, 다양한 목적과 입지를 가진 성을 짓기도 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확인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은 중동 요르단강 서쪽 기슭의 예리코(Jericho)에 있습니다. 무토기(無土器)시대인 기원전 8000년쯤에 만들어진 Jericho성(Walls of Jericho)이 그것입니다. 한반도에는 그보다 뒤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검단리 유적의 청동기시대 마을에서 토성(흙으로 만든 성)의 원시적인 형태인 토루(土壘, 흙으로 만든 벽채)와 환호(還濠, 일정 범위에 도랑을 둘러 방어시설로 사용하는 것)가 최초의 마을 방어시설로 확인됩니다. 또한 충청남도 부여군 송국리 유적의 집자리 유적 외곽에서도 목책(木柵, 나무를 일정 간격으로 세우거나 엮어 방어시설로 사용하는 것)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성곽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문헌에서도 한반도 초기 성곽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에서 ‘한 무제에 대응하여 고조선이 왕검성(王儉城)에서 1년간 항쟁하였으나 끝내 몰락했다’라는 기사가 확인됩니다. 그리고 『삼국지』 「위서동이전」의 진한에 대한 설명에서 ‘有城柵(성책이 있다)’고 하고 있고, 한(韓)에 대한 설명에서는 ‘그 나라 안에 무슨 일이 있거나 관가(官家)에서 성곽을 쌓게 되면...’이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마지막 성인 거제도 옥산성의 비석에 1873년 10월 15일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는 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비교적 최근까지도 성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리코성 복원도 (출처:https://www.thearchaeologist.org/blog/ancient-jericho-the-first-walled-city-in-histor
경상남도 거제도 옥산(금)성 전경 (필자 촬영)


  이처럼 성은 성벽으로 두른 일정 범위의 마을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성곽을 쌓는 목적은 여러 가지라고 했는데, 한반도에 있는 성곽은 여러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도성과 읍성입니다.

  국가나 마을 행정의 핵심이 되는 시설을 보호하며 가장 규모가 큰 유형은 도성과 읍성입니다. 도성은 한 국가의 도읍이나 도읍 내 핵심 시설을 둘러싸는 성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평양성, 부여 부소산성, 경주 월성 등이 있습니다. 읍성은 읍을 둘러싸는 성으로, 중국의 경우 청동기시대부터, 한반도에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기록에서 확인됩니다. 옛날 지방에 있던 부, 군, 현 등의 행정 관서가 마련된 고을에 유사시 외적에 대비하고, 편리한 행정을 위해 마련한 성곽입니다.

 이런 성들 이외에,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 본 만리장성이나 천리장성은 국경을 따라 길게 설치한 장성(長城)으로 분류되고, 여행지로 유명한 화성행궁이나 광주행궁, 강화행궁 등은 왕이 평상시에는 거주하지 않지만 행차했을 때 일정 기간 머무르기 위해 마련한 조선시대 성곽의 부속시설입니다. 그리고 나라의 중요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하기 위해 고려시대의 창성(倉城)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읍성의 배치도 (출처: 『한국성곽 용어사전』)


  성곽을 지을 때 사용한 재료 역시 흙, 돌, 전돌(흙을 구워 돌처럼 사용하는 것. 현대의 벽돌과 유사), 나무기둥, 석회 등으로 다양했습니다. 토성의 경우 지금 보기엔 그저 하나의 둔덕을 쌓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 나뭇가지, 낙엽과 같은 물질을 넣고 불을 지르기도 하고, 나무기둥을 세워 흙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토성들의 성벽은 판으로 거푸집을 새우고 흙을 다져서 더욱 단단한 성벽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석성과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무너지기 쉬워서 지금은 성벽 대신 성 안의 공간으로 사용했던 평평한 땅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성’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돌을 쌓아서 만든’ 석성 역시 순수하게 돌만으로 쌓은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돌을 바깥 면으로 두고 안에는 흙을 채워 넣은 성(협축식 석성), 한쪽 면에만 돌을 쌓은 성(편축식 석성), 전돌을 쌓고 사이사이에는 석회를 발라 단단하게 만든 성(전성) 등 많은 유형이 있습니다. 성을 쌓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동력, 기술력이 드는 만큼 시공간적 상황에 알맞게 재료를 조합하여 축조합니다. 따라서 성곽은 당대 건축기술력과 정치력이 총체적으로 반영된, 그 자체로서 하나의 커다란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성들은 ‘아, 이런 성이 있었구나.’ 정도만 알게 되면 현재의 필요에 따라 허물어버리거나, 그 위에 건물을 지어버려도 될까요? 고고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으로서, 쉽게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고고학적 발굴조사들은 ‘구제(救濟)발굴’입니다. 아파트, 상가와 같은 건축물이나 도로를 지을 때는 건축을 신청한 면적에 대해 사전에 발굴조사를 하여 문화재가 지하에 있는지 꼭 확인하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고고학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서 하는 ‘학술발굴’과는 다른 것이죠. 그리고 발굴조사로 발견된 부동산적인 문화재에 대해서는 그 가치에 따라 사적(事跡, 역사적으로 중요하여 특별히 취급되는 유적)으로 지정하는 등의 특별한 보호 조치가 취해질 수도 있고, 나아가 그 자리에서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성곽은 발굴조사 된 부동산적 문화재(전문용어로 ‘유구’) 중 가장 규모가 큰 만큼 앞서 말한 문화재 정책과 일반인들의 갈등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합니다. 문화재청에서는 각 시마다, 그리고 각 문화재 분야마다 전문위원을 두고 있습니다. 특정 지역 개발을 위해 구제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 중요한 문화재가 발견된다면 이 전문위원들의 심의로 개발이 중지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조치에 따라 그 일대에 건축물을 짓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법 때문에, 땅을 이용하려는 사람들과 문화재청이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에도 이런 갈등 사례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부산광역시 기념물인 구포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부산에 지은 성곽으로, 당시 조선 사람들이 건설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엄연한 ‘우리 민족’의 문화재로 볼 수 있고, 침략의 역사를 일깨워주는 중요한 실물 자료 중 하나입니다. 또한 당대의 기술력이 상당 부분 반영되어 조선의 성곽 축조 기술을 고고학적으로 연구·복원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문제는 ‘구포왜성 역사문화공원(덕천공원) 조성 사업’을 진행하며, 그 일환으로 구포왜성 근처에 건물을 지으려 하면서 생겼습니다. 구포왜성 주변도 문화재 구역으로 볼 것인가를 두고 문화재 전문가들과 사업자, 공공기관 사이의 공방이 벌어졌습니다. 문화재 구역에서부터 일정 범위 이내에는 법령이 정한 높이 이상으로 건물을 짓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부동산 관련 카페에서도 구포왜성과 이해관계에 얽힌 일부 네티즌들이 ‘일본군이 지은 성인데, 그게 왜 문화재인가요? 성을 이전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와 같은 반응을 보이며 답답함을 토로했습니다. 하지만 그 커다란 성을 원형 그대로 이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즉, 도시 개발 과정에서 문화재 보존·복원과 도시의 개발은 아직 공존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잠시만 눈을 돌려 우리에게 친숙한 수원화성, 삼년산성, 공산성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수원화성은 정조 때 지어진 성이었으나 일제강점기의 상당한 훼손으로 인해 흔적만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화성성역의궤』에 자세한 설계도와 설명이 남아있어 원형에 매우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고, 덕분에 복원 문화재임에도 불구하고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그러한 명성과 조선시대 성곽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현재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수도권 여행객들의 관광명소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백제의 도성이었던 공주 공산성은 ‘백제 고도의 역사를 담은 유적’으로 불리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 역사 유적지구에 속해 있습니다. 공산성 역시 사계절 내내 뛰어난 풍경을 담아 산책하기 좋은 공주 관광명소, 나아가 충청남도의 관광명소로 유명합니다. 앞서 언급한 두 성곽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축성 중 하나인 보은 삼년산성도 뛰어난 경치와 웅장한 규모로 인해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며 자연과 문화를 즐기러 온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배우는 것은 역사가 되풀이되기 때문입니다. 과거 사람들의 경험이 주는 교훈들은 개인, 집단, 나아가 사회가 현재를 살아가는데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과거로부터 현재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 교훈들을 누군가의 말로 전달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직접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한 번 더 생각해보게 해주는 것이 현재 남아있는 문화재입니다. 구석기시대의 석기, 신석기시대의 토기, 삼국시대의 귀걸이, 고려시대의 청자뿐만 아니라 집터, 사원, 그리고 성곽 같은 것들 말이죠. 

  문화재에는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기술, 관념과 손길이 묻어 있습니다. 그것들을 느끼며 얻는 즐거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앞서 소개했던 성곽과 같은 관광명소들에 여행을 다니며 옛 문화를 직접 찾아 다니는 것입니다. 앞부분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성곽은 그 자체로서 과거의 한 시대가 집약된 문화입니다. 이런 성곽들이 남아있지 않다면, 우리는 여전히 역사 속의 기록으로만 그 존재를 알 수 있어 옛 문화를 직접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기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사라질 위기에 처한 옛 성곽들에 관심을 가지고, 보존하는데 힘을 더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 참고문헌

손영식, 2011, 『한국의 성곽』, 주류성

안재호, 1990, 『울주 검단리 유적 발굴조사』

국립공주박물관, 1993, 『松菊理』

사마천, 『사기조선열전』

진수, 『삼국지 위서동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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