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unjung Kim Jul 09. 2023

찬란하고 쓸쓸하신(身)

나의 육아

육아는 장비빨, 국민육아템, 스마트한 육아

요즘 육아는 정말 똑똑해졌다. 아니, 요즘 부모들이 똑똑한 육아를 하고 있다는 게 맞는 말이지 싶다. 신박한 육아용품들이 하루를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온다. 실제로 구글로 장난감 하나만 검색해도 SNS에 각종 장난감 광고들이 줄줄이 이어져 나오고, 심지어는 내가 찾지도 않은 제품들까지 추천해 주며 내 아이게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은(사실은 육아를 좀 쉽게 하고 싶은) 부모의 마음을 사로잡아 구매버튼을 누르게 만든다. 물론 남들이 좋다 하는, 추천 수가 많은, 후기가 좋은 육아용품들이 늘 나의 아이에게도 잘 맞다는 보장은 할 수 없다. 비싸게 사서 써보지도 못하고 당근마켓에 헐값으로 팔아야 하는 일도 종종 있으니.

육아용품뿐만이 아니라, 아이와 가기 좋은 어디 좋은 시설이나 공연,  키즈카페들을 추천해 주고 입장료를 최저가에 구매해 주는 블로그나 앱들도 많다. 물론 내 아이가 그것에 크게 부응해주지 않아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경우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육아'정보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으로 질적인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적잖이, 심통이 난다.

 적절한 시간과 노력, 합리적인 돈을 들여 아이들과 좋은 경험을 쌓아가는 남의 육아를 보며

'아휴 나도 첫애 때는 그랬어..' 심드렁하게 말한다.

그들의 육아스타일을 부러워하지만 내심 그런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다.


제목에서처럼, 나는 감히 나의 육아에 '찬란하고 쓸쓸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썼다. 허세라고 해도 좋고 자아자찬이라 해도 좋지만, 지난 6년간의 아니 도합 13년간의 나의 삼 남매 육아는 유쾌하다가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좌충우돌 성장기이자 인간다큐멘터리 같기 때문이다. 전전반부는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며 변하지 않는 현실과 '나'가 끊임없이 대립하는 지루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뭐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전반부에 이른 지금은 나의 감정과 육아를 분리시킴으로써 갈등을 최소화하려고 노력 중이다. 내 (부정적) 감정이 행동이 되지 않게, 내 (부정적) 생각이 말이 되지 않게 한다는 것이 말이 쉽지, 육아에서 뿐만 아니라 사실 우리 모두 매일 이 지루한 자기와의 싸움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루에도 수십 번 찬란하게 빛났다가 처절하게 바닥에 처박혔다가를 반복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게 되는 그런 날이 온다면(오기는 할까) 그런 인간승리의 날이 온다면 나의 육아는 조금 더 편안해져 있을까.

육아의 끝은 어디일까.

오은영 박사님의 말을 빌어보면, 육아의 궁극의 목적은 자녀의 정신적, 신체적 독립이다. 우리 집 삼 남매가 이 궁극의 목적에 다다른다면 부모로서의 나의 몫은 어느 정도 끝난 셈이다. 끝이 있다는 말이 그저 반가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그런 끝이 있을까. 지금 상황으로 보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나는 요즘세대와는 이미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MZ세대를 따라가 보려고 사부작사부작 노력은 하는, 여전히  흔들고 아픈 청(장년) 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육아도 요즘 부모들처럼 스마트하고 스타일리시하게 하고 싶고 그렇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더랬다. 쌍둥이를 출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니, 쌍둥이를 출산하고서도 2~3년 애들 클 때까지만 바짝 힘들고 어린이집 가고 유치원 가고 나면 부모로서 '나'와 한 인간으로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나'의 몫을 하며 나의 파랑새를 찾아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가 원인 모를 병으로 오랜 병원생활을 하는 중에도 조금 크면 훨씬 좋아질 것이고, 늦더라도 완치되어 정상아이들처럼 잘 커주리라 생각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는 그 끝과 맞닿은 '나'의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며 그 시간들을 버텨왔던 것 같다. 그래서 몸이 피곤하고 힘들어도 시간을 쪼개 공부하고 책을 읽고, 세상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육아도 공부해야 한다는, 부모도 부모의 역할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육아서적도 읽고, 정보도 찾으며 세 아이들과 소통하고 함께 성장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둘째 아이의 육아는 그동안 알던 범주가 아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범주는 나의 상식에서 많이 동떨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내 아이는 조금 아픈 아이, 장애가 있는 아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했다. 장애 판정을 받았지만 장애 재판정받기 전까지 열심히 재활하고 치료하면, 언젠가는 비장애인처럼 생활하고, 일뱌학교도 가고 해서 '저 녀석이 언제 아팠었더라' 골똘히 생각을 더듬게 될 날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될 확률보다 기적이 일어나는 게 더 빠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던 정상적인 육아방식으로는 둘째를 이해할 수도, 돌볼 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아이의  장애를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부모인 내가 먼저 내 아이에게 장애라는 '프레임'을 씌워 아이의 능력과 활동을 제한하면 안 되었다. 그 균형을 맞추는 게 힘들어서 전문가에게 묻고 정보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어디까지 되고, 안되고'와 '계속할지 포기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의사나 상담사의 몫이 아니라 부모인 나의 몫이었다.  재활치료를 주 1회 할 것이냐 2회 할 것이냐, 언어치료를 할 것이냐 감각통합치료를 할 것이냐, 특수학급이냐 일반학급이냐. 일반적이지 않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엄살을 조금 부려서 말해보자면 '내 인생의 마지막 선택을 하듯'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들이 너무 자주 많이 찾아왔다. 본인 이외에 아이의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부모인 나라는 이유만으로 내 아이의 삶을 위한 선택을 내가 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겁고 어렵게 느껴졌다. 따지고 보면 첫째도 셋째도 어느 정도까지는 부모인 내가 선택의 범위를 좁혀주기도 하고 다른 선택지를 강요하기도 하면서 유독 둘째를 위한 선택은 늘 마음이 무겁고 고민이 된다.  그대로 마음의 문제였으면 훌훌 털어버리겠는데, 선택의 결과가 고스란히 내 몫이라 쉽지가 않다. 선택의 결과 때문에 너무 괴롭고 힘들었던 시간들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기에 그 고민의 시간은 외롭다.

그래서 입에 잘 붙지도 않는 말을 계속 되뇌어 본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아이는 내가 아니다.  잘 양육해서 독립적인 인격체로 사회일원으로 내보내는 것이 양육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꼭꼭 씹어서 삼켜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들의 조력자이다. 필요할 때는 답을 찾아가는 길잡이가 될 수도 있고, 필요할 때는 답안지에 답을 써넣어주는 대필자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나의 육아는 장애와 비장애 그 경계에서 찬란하고 쓸쓸하게 써져 갈 것이다.



불행한 사람은 갖지 못한 것을 사모하고
행복한 사람은 갖고 있는 것을 사랑한다
하워드 가드너


매거진의 이전글 이미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