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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ung Kim Nov 13. 2024

벼려지지 않는 삶으로 살기

더 이상 나의 의미를 찾기 않기로 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나의 의미


수많은 이들이 태어나 평생, 열심히 나의 '의미'는 무엇인지 찾으며 살아간다. 어떤 이들은 확신과 열정으로, 어떤 이들은 불확신과 의무감으로 보이지 않는 안갯속을 더듬대며 살아간다. 또 어떤 이들은 이조차 한갓진 자들의 복에 겨운 소리라며 그저 살아 있으니 산다 한다.


세상에 왔다간 의미 하나쯤은 남기고 싶은 것은 오직 인간만이 가진 의지일지도 모른다. 인간을 제외한 생명체는 생존과 번식으로서 그 의미에 마침 도장을 찍지만, 인간만은 생존과 번식을 뛰어넘어 굳이 역사에 그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내 이름이 새겨진 내 물건에 애착을 느낀다. 이름표, 통장, 집, 큰 범주로서 내 이름 석자가 글로 쓰인 모든 것들- 책이나 논문 1 저자, 특허, 더 크게는 노벨상-을 통해 나의 의미, 내가 세상에 온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며 산다.



그런데 내가 찾는, 나는 과연 진짜 존재할까?


신학적으로 나라는 실체는, 신이 창세 전부터 자신의 형상과 닮은 존재로 창조한, 유일무이한 단독자이고, 자아는 소명(신의 부르심)좇아 천로역정을 하는 내비게이터와 같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나, 우리가 그토록 소중해마지않는 나는 사실 실체가 없다고 한다. 그저 우리 뇌가, 신체의 감각신호들을 통취합하는 의식이 존재한다고- 인간만의 특별한 진화의 영역일지도- 그런 존재가 있다고 느낄 뿐이라는 것이다.

정신의 ‘나’는 나로 들어온 모든 감각신호와 그 처리과정, 그 반응으로 구성됩니다. 청각, 시각, 후각, 촉각, 미각은 모두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감각입니다. 이들 신호는 따로따로 뇌로 들어오죠. 그런데 이 신호들이 뇌에 모여서 마치 어떤 하나의 존재가 이들을 통합적으로 느낀다는 의식을 만들어냅니다. 꼭 그럴 이유가 없는데 말이죠. 뇌의 각 부분도 따로 작동합니다만, 뇌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의식이 있는 듯한 느낌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조현병 환자는 여러 개의 ‘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나’도 누군지 모르겠는데, 그런 ‘나’를 사랑하는 ‘나’는 그런 ‘나’와 같은 ‘나’일까요?

과학산문 Scientific prose vol.1 김상욱 교수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거대한 우주부터 작은 세포 하나에 이르기까지 창조주의 위대하심을 감사하며 그의 나라를 위해 여지길 기도했었다.

 한 때 이공계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양자역학을 통해 전자의 존재와 분포 확률을, 그 에너지 값을 수많은 수식을 통해 계산하면서, 죽었다 깨나도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미치도록 이해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과학을 통해 나의 존재의 가치를 느끼고 과학자의 삶을 살고싶어했다.

(내가 원자와 전자로 이루어진 화학공장이라니!!!!)

그래서 공존할 수 없지만, 영역을 모두 좋아했다.


그런데 나는 더 이상  두 사이에서 헤매지 않기로 했고, 여기서 나의 의미를 찾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과학이 어떤 우연한 사건이라고 흐려놓은 공백, 신의 영광과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고 채워 넣었고, 나는, 그저 끝없는 지구의 한 시간에 신의 은총으로 먼지 같은 한 지점을 살다가 영광스러운 그의 나라로 가게 될 존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딘가에 있을 나의  파랑새 말고, 오늘 숨 쉬고 느끼고 생각하는 삶을 사는 그냥 나를 살자고,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이 논쟁의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나는 현재 삶을 열심히 찬란하게 살고 있고, 이 지구가 멸망하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인류가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소망한다.)


사실 그렇게 마음먹은 게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열심히 나를 벼르고 벼르는 삶을 살며,  잘 벼려진 칼로 언제 가는 내가 나의 쓰임에 맞는 나로 살 수 있을 거라 오래 고대하며 10대를 20대를 살았다. 


잘 벼려진 주방 칼로 요리를 해 본 사람은 안다.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칼날이 알아서 슥슥 재료를 자른다는 느낌을.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아도 여기저기 이가 나간 칼은, 손목, 팔, 어깨, 온몸이 고된 노동을 해야 하며 요리가 더디고 힘들다는 것을 안다. 흑백요리사에 나가지 않더라도 주방 칼은 잘 벼려진 칼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또 잘 벼려진 칼에, 손을 베어 본 사람은, 소름 끼치게 슥슥 뼈까지 파고드는 경험을 해본 사람은, 날카로운 칼날을 보면 심장이 떨리 린다는 말을 이해할 것이다. 요리에 ㅇ 근처도 가본 적 없는 철부지 신혼시절, 대차게 손가락을 댕강 베어본 뒤 나는 도저히 잘 벼려진 칼날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쳐다만 봐도, 아니 번쩍 잘 벼려진 칼날을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지고, 그날 피가 낭자했던 그 순간이 떠오르며  멀쩡하던 손가락이 아리고 아프기 시작했다. 치료도 잘했고, 지금 손도 멀쩡하지만 정신적 충격은 심각했는지 꽤 오래간다. 죽기 전까지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극복할 방법도 모르겠지만 시도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잘 벼려진 삶의 기대 때문에 마음도 똑같이 상처 났었다. 번쩍번쩍 빛나게 벼렸는데 뭐 하나 제대로 베지 못한 칼날은, 원망과 자책이 되어 나를 난도질하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출혈로 정신적 쇼크도 있었다. 응급처치가 잘 되어 상처는 아물었어도, 정신적 상처의 흔적도 트라우마처럼 남는가 보다.

그래서 나를 지키기 위해, 더 이상 나를 벼르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내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며 나를 벼르라고 닦달하지 않기로 했다.

너무 무뎌져서 뻑뻑하지도, 번쩍번쩍 빛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쓸만하기만 한 삶을 살기로 했다. 내가 나를 찾던 방황의 시절에서 이제 현재의 나를 살기로 결정한 이유이다.

맛있는 음식 배부르게 먹고 잘 소화만 시켜도 만족스러운, 그런 오늘을 감사하며 삽니다.


'인생의 의미가 뭘까?'에 답을 찾는 게 아니라, '나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라고 바꿔 생각하는 게 더 맞지 않을까.
-다니엘 린데만. 대화의 희열 2




저만 그렇다는 것이지 모두의 삶을 일반화하지 않겠습니다. 각자도생입니다.

독자님들의 오늘의 삶을 파이팅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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