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리 살가운 사람이 아니다. 아니다. 나는 그리 살가운 사람이 못 된다. 왜일까?
최근 나는 내 영혼에 금가는 감각-이 감각은 후·미·촉·청·시각과 무관한 제6감-을 미세하나 예리하게 느끼면서 스스로 물었다: 나는 살가운 사람인가? 뜻밖에 한 치 망설임 없이 나는 아니라고 스스로 대답했다. 그런데 왜 이 진실에 철저히 유념하지 않은 채 죽음이 30cm 이내 거리에 있는 나이까지 살아왔을까? 앞으로도 살가움은 남 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을까?
나를 가장 잘 아는 주위 사람들은 내 질문과 대답을 이상하게 여길는지도 모른다. 특히 내게 마음 치료를 받은 사람이나 가까운 제자들은 선생님은 단정하면서도 다정한 분이라고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들 인식은 맞다. 치료자나 선생으로서는 그렇다. 어떤 특정 목적을 계기로 맺어진 두터운 인연에서 내가 보이는 태도는 근본과 기본에서 살갑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다: 어떤 목적에 걸맞은 특화된 인격에서 배어나는 언행은 살갑다.
이런 살가움은 내 정체성 작은 일부일 뿐이다. 특정 목적 넘어 전인격, 그러니까 자연으로서 나는 살가운 사람이 아니다. 살가움이란 근원적으로 시생대 학습에서 형성되는 감성을 밑절미로 하는 태도며 능력이다. 그러나 내 시생대는 어머니하고 접촉이 거의 되지 않았고, 아버지는 온전히 부재한 시기였다; 살가움을 배울 기회가 거의 송두리째 사라진 시기였다. 어머니는 유년기에 완전히 사라졌고, 아버지는 차갑고 무서운 존재로 소년기 10년을 결빙시켰다.
아기답게 아이답게 부모한테서 살가움을 익히고 주고받지 못한 채 앞당겨 어른이 돼버린 나는 무뚝뚝한 점잖음을 탑재한 어른으로 살아왔다. 실제로 너덧 살 무렵 내 별명이 “영감”이었다. 결정적 이유는 혼잣말이었다. 사실 혼잣말이라기보다는 늘 마주하는 풀과 나무가 이야기 대상이었다. 그렇게 혼자 산들로 냇가로 쏘다니며 놀았다. 늘 뒷짐을 지고 다녔으며 보채는 일도 뭘 달라는 일도 없었다. 결핍, 특히 사람, 무엇보다 부모 결핍을 묵묵히 무심히 견뎌냈다.
내게 살가움이 한 톨이라도 있다면, 필경 그리움이 응결된 것일 테다. 그 한 톨 살가움으로 나는 한 여자 사람과 결혼해서 살아냈고, 딸 하나 낳아서 키워냈다. 부족했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그래, 아직도 시간은 남아 있다. 조금 더 따스해지고, 더욱더 상냥해지기로 한다. 그래서 이룰 변화가 다른 생명, 그 너머 비생명에도 번져간다면 다시 무슨 발원을 하랴.
나는 그리 살가운 사람이 못 된다. 그렇다. 그래서 나는 그리도 살가운 사람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