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회사에 입사했을 때 국제협력 파트에 근무하던 동기들이 스위스 제네바에 출장이라도 다녀오면 하루나 한나절 짬을 내서 인터라켄 가서 융프라우를 보고 왔다는 얘기를 간혹 듣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인터라켄은 뭐고 융프라우는 뭐길래 저리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것이며, 제네바 뒷산인가 할 정도로 가까운 곳이려니 싶었다. 물론 인터넷을 찾아볼 수는 있었으나 그다지 궁금하진 않았다.
그 후 약 20년이 지난 지금 비엔나에서 홀로 여행을 간다. 그 인터라켄과 융프라우 요흐를 영접하러.
부끄러운 얘기지만 난 인터라켄을 처음 들었을 때는 인터(서로, inter) 락(걸다, lock) 켄이니 무슨 기어가 두 개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생긴 곳인가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인터(inter)는 맞았으나 laken이 레이크, 즉 호수다. 그러니 두 호수 사이에 있는 곳이라는 의미가 바로 인터라켄이다.
툰 호수와 브리엔츠 호수 사이가 인터라켄이다.
유럽에 파견 갈 때 현대 다이너스 카드(과도한 혜택으로 적자를 봤는지 지금은 단종된 카드다)를 만들어 갔다. 전달 사용실적에 관계없이 전 세계 공항 라운지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물론 비즈니스 항공권 라운지와 달리 요즘 인천공항에 있는 마티나 라운지 같은 일반 라운지이나, 그것만 해도 어딘가.
그래서 비엔나에서 유럽 여행을 갈 땐 비엔나 공항 라운지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가는 것이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괴서 맥주, 애플 주스에 소고기 스튜, 젬멜에 애플 스트루델. 아침치고는 과하지만 그런들 어떠랴. 하루 평균 2만보를 걷는 나에겐 오히려 당 보충 기회라고나 할까?
스위스는 EU 국가가 아니다. 한국에서 스위스 여행 가는 분들은 전 세계에서 사용가능한 유심(USIM)을 사서 쓰면 되지만, 비엔나에 거주하던 나는 오스트리아와 EU에서만 쓸 수 있는 유심이어서 스위스에서는 따로 유심을 구입해야 했다.
비엔나 지인이 스위스 공항에서 트랜짓하면서 대기하는 동안 인터넷을 썼다가 요금 폭탄을 맞았다는 얘기가 생각나서 더더욱이나 조심했다.
약 20프랑에 10기가. 사용기간은 6개월인지 1년인지여서. 물가가 비싼 나라라 걱정했던 스위스에서 나름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취리히 공항에서 내려 역으로 이동해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눈에 익은 작품이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색감이며 모양이 과천 코오롱 본사 앞 분수대에 있는 작품과 매우 유사해서 한눈에 딱 봐도 같은 예술가의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참고로 작가는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Phalle, 1930.10.29~2002.5.21)이며, 1961년에 '슈팅 페인팅 shooting painting'으로 누보레알리즘 작가로서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슈팅 페인팅이란 마을 축제와 같은 곳에서 일반인들에게 총을 나눠주고 캔버스 위에 매달아 놓은 물감 주머니를 쏘게 해서 무작위적인 추상화를 그려내는 기법이라고 한다.
과천 코오롱 빌딩 앞 분수대 조각상이다.
아침 일찍 취리히에 도착해 그 길로 바로 인터라켄으로 갔다.
9월 중순이기도 하고 날이 흐려서 호수의 색감이 어둡지만 해만 쨍쨍 나면 그야말로 에메랄드 빛 호수가 장관을 이룬다. 캐나다 로키에 있는 루이즈 호수를 처음 영접했을 때의 그 느낌.
인터라켄역에 내려 산악열차로 갈아타고 나의 숙소가 있는 그린델발트로 간다. 인터라켄 산악열차의 색감은 스위스 기차(SBB)의 빨간색과는 대조되는 약간 무거운 느낌이다.
좌석마다 있는 테이블에 요약된 인터라켄 지도가 있다. 물론 미리 공부를 하고 왔지만 한눈에 인터라켄에서 뭘 할지 어디로 갈지가 눈에 들어온다. 기발한 아이디어다.
그린델발트, 클라이네샤이덱, 융프라우 요흐, 피르스트, 라우터브루넨, 뮤렌, 슈니케 플라테.. 이름도 생소하지만 그 감동 때문에 이름이 하나하나 살아서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만큼 기억에 남을 만한 여행지라서가 아닐까 한다.
그린델발트 직전역인 터미널 역에 내렸다. 내가 머물 숙소는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린델발트 시내에 아이거 북벽을 바라보며 있는 좋은 호텔에서 묵는 것도 좋으나 나 혼자만의 여행이기도 하고 숙소에 그다지 진심인 내가 아니라 스위스 전통가옥인 '샬렛'에 묵기로 한다.
샬렛은 에어비앤비나 부킹스닷컴에 가면 많다. 그런데 어느 곳을 골라야 할지 모르는 분들은 '앨리스 할머니'로 네이버 검색을 해 보면 어떨까.
네이버에 검색해서 앨리스 할머니를 치면 연관 검색어로 '스위스 앨리스 할머니'가 뜬다. 워낙 한국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아 심지어 1년 전부터 예약이 마감이라고 할 정도다.
예약은 메일(alice.steuri@bluewin.ch)로만 받고 결제로 당일에 스위스 프랑으로만 가능하다고 한다.
나도 블로그를 보고 메일을 보내서 하루 후에 답변을 받았는데, 내가 예약하려던 오리지널 앨리스 할머니네는 이미 예약이 다 찼으니 괜찮으면 며느리가 하는 다른 샬렛에 예약하겠냐 해서 그렇게 예약을 했다.
그린델발트 시내에서 한 정거장 떨어져 있지만 아무런 불편함이 없던 숙소였다.
숙소 방에서 뒤로 보이는 풍경. 멀리 구름 낀 아이거 북벽이 보이고 뒤로는 스위스 전통가옥들이 보인다. 그대로 액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을 열고 시원한 스위스 공기를 흡입하면서 비엔나에서 가져온 율리우스 마이늘 티 한잔 마셔본다. 서울에서 미세먼지에 시달리던 터라 스위스의 마스크라고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차갑고 청량한 공기를 들이켜면서 깨끗한 공기가 이렇게 소중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단 체크인을 하고 짐을 푼 다음 융프라우 요흐로 가는 길에 동네 어귀에서 발견한 그림. 천상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과 산과 달, 그리고 새, 꽃. 한국스러운 그림이라 눈에 띈다. 집주인이 한국에 관심이 많은 분인가 보다.
터미널 역에서 본 마을 전경이다. 산속에 옹기종기 집을 짓고 수십 년 수백 년을 살아온 삶의 모습들. 그 삶을 요약한다면 '평화'이다. 그래서 영세중립국 선언을 하고 평화를 그리도 갈구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