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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민 Oct 09. 2023

산은 영겁의 시간을 거쳐 거처를 확고히 하였다

나는 산을 똑바로 바라보고 싶었다.

산은 영겁의 시간을 거쳐 거처를 확고히 하였다.

나는 산을 똑바로 바라보고 싶었다.

산을 똑바로 바라보며, 짧은 인간의 생과 달리 영원처럼 느껴지는 그의 시간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나 앞 길에 대한 걱정에, 지나간 일에 대한 기억에, 잡다한 망상에..  쉴 새 없이 떠오르는 마음의 부산물에 산의 웅장한 위엄은 내 눈 앞에서 흐려지고 만다.

 

산을 걷는 행위는 순수한 자연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벽들을 내 앞에 아주 뚜렷하게 펼쳐놓는다. 산을 산으로 보지 못하고, 저 멀리 과거와 미래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자신을 보며 내가 지금 이 순간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지가 뼈저리게 느껴진다. 나는 내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현재에 생생히 살아있을 수 없다.


산은, 삶 속 생생히 존재함을 가로막는 것 모조리 내 알아차림에 흩뿌린다.

나는 이러한 산의 자비에 감탄한다. 산은 이 일을 너무나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행한다.


고집불통인 이 인간에게 끊임없이 유하게, 우아하게 타이르는 태산에 지혜에 비좁은 나의 세계 버리고 그 넓고 평이한 세계에 나를 놓아버리고 싶었다.






삐, 삐, 삐..

새벽 2시에 알람이 울렸다.


드디어 캉라를 넘는 날이었다. 물을 끓여 차를 만들었다. 텐트를 정리하는데 고정핀이 완전히 얼어버려 얼음바닥에 박혀 있었다. 가스버너 불로 지져서 겨우 빼냈다. 텐트에 붙은 얼음은 떼낼 수 없었다. 그대로 배낭에 집어넣고 캉라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동트기 전 히말라야 한복판의 무시무시한 추위가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침낭을 꺼내서 몸에 둘렀다. 그리고 얼마 가지도 못하고 눈 위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몇 초 후에 다시 눈이 떠졌다. 눈을 번쩍 떠서 흐억 흐억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다시 삶을 붙잡아 보려 했다. 마음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불규칙한 심장 박동과 제멋대로인 들숨과 날숨에 한참을 헐떡였다. 끓여둔 차를 보온병 컵에 따랐다. 차는 담기자마자 곧바로 얼음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스피린을 차에 녹여서 얼음으로 변해버리기 전에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 다시 캉라를 향해 걸었다.



짙은 남색의 새벽 평야 가장자리에서 주홍색 빛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태양은 떠오르며 설산 꼭대기에 자신의 흔적을 살포시 칠했다. 불그스름 물드는 산마루를 보며 이제 살았구나, 생각했다. 빛과 온기와 함께 걷는 것은 어둠과 추위 속에 걷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캉라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GPS를 간간히 확인하며 지도상으로 크레바스가 몰려 있는 곳을 피해서 돌아 걸어갔다. 다행히 패스 근방 기온이 무척 낮은 탓에 밤사이 내린 눈이 아직 단단히 얼어있어서 눈 위로 걸어도 그 속으로 발이 많이 빠지진 않았다. 또, 눈이 아주 많이 내리진 않아서 몸통 전체가 빠질 만한 거대한 크레바스는 하늘을 향해 그대로 활짝 열려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어젯밤보다 이전에 내린 눈(이를 올드스노우라 부른다) 이 퍼석퍼석한 상태로 그 밑에 끝없는 공허를 감추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크레바스를 요리조리 피하며 남은 힘을 쥐어짜 내 올라갔다. 5300M가 넘는 고도에서 배낭을 메고 오르는 일은 고되다. 열 걸음 걷고 멈추고, 스무 걸음 걷고 멈추고, 나만의 리듬을 만들어서 올라갔다. 가끔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면 가방 벗어내려놓고 앉아서 산등성이의 침묵을 바라보았다.



해발 5450M. 캉라에 도착했다. '라' 는 티베트어로 고개를 뜻한다. 캉라는 인도 북부 히마찰 프라데시와 라다크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10년 전에야 인도 정부의 북인도 고속도로 건설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전에는 고산의 태양에 거칠게 변해버린 붉은 뺨을 가진 어느 상인은 온순한 야크 등 위로 잡다한 물건을 실어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그랬듯이 캉라를 넘어서 마을에 필요한 물품을 가져왔을 것이다.


고속도로가 개통된 지금은 아무도 다니지 않는 허허벌판이 되었다. 주홍빛 암석을 품은 고대의 빙하는 고독에 미소 짓는 듯하였다. 생명 하나 없는 광활한 빙하 벌판은 신비로웠다. 기괴한 모양의 얼음 조각과 하늘을 향해 이빨 쩍쩍 벌린 크레바스를 바라보고 있자니 섬뜩하기도 했다. 마음 한 켠에 피어나는 자그마한 공포는 너무나도 순결하게,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무언가를 바라봄에 당연한 마음의 동요일지 모른다. 내가 순수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오게 되었는지를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살아서 캉라에 오른 감격이 사그라들 즘에 하산하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길은 오르는 길보다 훨씬 쉬웠다. 크레바스를 잘 피해서 스키 타듯이 미끄러지며 슝슝 내려왔다. 반쯤 내려왔을까, 빙하 벌판 한복판에 오묘한 돌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갔다. 미라가 되어버린 히말라야 푸른 양이 갉아먹힌 주둥이 반 쪽과 뾰족한 갈빗대를 드러낸 채 평평한 돌 위에 저항 없이 올려져 있었다. 마치 제단 위에 바쳐진 제물처럼. 이를 목격한 그 순간, 삭막한 빙하 황무지의 서늘함이 다시금 깊게 파고들었다.



걸음을 재촉하여 문명으로 향했다. 사는 소리가 북적이는 곳까지 18KM 가 남아있었다. 


캉라 트레킹은 마치는 지점이 조금 뜬금없다. 100M 정도 수직하강 하여 파둠과 다르차를 연결하는 건설된 지 갓 2년 된 인도답지 않은 말끔한 고속도로 위로 떨어지는 것이 이 여정의 마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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