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폭풍이 몰아친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되었다.
9-10KM의 빙퇴석 구간을 통과하는데 꼬박 3일이 걸렸다. 빙하 지대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온통 얼음뿐, 풀 한 포기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야생이었다. 사방에 진동하는 한기에 뼛속까지 으슬으슬해졌다. 하나의 생명도 품지 않은 광활한 얼음 대지 위를 걸어갔다. 아이젠은 얼음 바닥에 박히며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내었다.
빙퇴석 구간에서 잃은 시간과 거리를 만회하기 위해 조금만 더 걷자, 힘을 내어 조금만 더 걷자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날씨가 심상치 않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껏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먹구름은 곧 우박이 되어, 눈이 되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황급히 텐트 칠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4790M에 위치한 베이스캠프 I 근방에 텐트를 쳤다. 텐트 친 자리로부터 5450M에 위치한 캉라 패스 까지는 10KM가 남아있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되었다. 암울한 침묵이 텐트 안을 감돌았다. 바깥에는 눈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다음 날이 드디어 캉라 패스를 넘는 날인데 눈이 내리면 크레바스를 다 뒤덮기 때문에 마치 장님이 지뢰밭을 걷는 격이었다. 폭이 몇 미터가 넘는 크레바스 안으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어떡하지? 그렇다고 왔던 길을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방 속을 뒤져서 남은 음식을 계산해 보았다. 하루치, 길어야 이틀 치 뿐이었다. 왔던 길로 내려가는데 최소 일주일은 걸릴 터인데 에너지 소모가 심한 와중에 굶으면서 내려가다간 탈진 상태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인간은 미래의 확실성에서 행복을 찾는다. 미래의 확신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사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미래의 불확실성은 현재의 행복을 반납할 만큼 인간에게 두려운 존재다. 내일 당장의 미래가 불확실해진 나는 가슴이 조여왔다. 유서를 써야 하나 고민했다. 텐트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우박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텐트에 적힌 NEMO사의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NEMO를 안에서 보니 OMEN (전조, 징조라는 의미; Ominous는 '불길한'을 의미한다)으로 읽혔다. 걱정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걱정을 비춘다.
새하얀 눈밭 아래 모습을 감춘 크레바스 위로 눈이 아직 얼어있을 때 건넌다면 끝없는 공허 속으로의 추락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안전한 선택인 것 같았다. 가장 추운 새벽 2시에 일어나 출발하기로 했다. 가방에 있는 옷을 모조리 꺼내어 매듭을 지어 이었다. 크레바스로 떨어지는 상황에 대비하는 마지막 보루였다. 내일 내게 죽음이 닥칠까, 초연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