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상을 살아가는 이유
내가 일상을 수행할 수 있는 이유가 약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밥 대신 약을 밀어넣는 삶, 밥보다 약이 더 중요한 삶. 나는 나아가야 하고 오늘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에, 같잖은 일이라도 해내야 하기 때문에, 성실해야 하기 때문에.
물론 같잖은 핑계다. 어디까지나 핑계인 걸 안다. 무기력한 내 몸이 눈물이 흐르지 않고는 도무지 일어나질 않아서 지어낸 핑계다.
일상을 살아갈 소량의 신경전달물질을 필요로 하는 삶. 약에 죽고 약에 사는 삶이 싫어 의지로 버텨왔으나 내 의지는 죽어도 몸에 지배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나는 죽어있었다. 잠이 쏟아지고 앉아있을 힘조차도 없었다. 나는 몇 번 출발을 결심했으나 나의 이유들이 그리워져 다시 돌아왔다. 이전과는 다른 출발이었고, 이전과는 다른 시도였다. 다행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도 그 후유증을 앓고 있다. 조금 피곤하다.
어제는 수업받는 친구에게 침전하다의 의미를 설명했다. 윤동주 시인의 쉽게 쓰어진 시에 등장하는 시어였다. 수업 준비를 할 때부터 나의 상태라고 일컬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곧바로 그만뒀다. 이미 수능 문학은 처참하게 무겁다. 무거운 공기에 짓눌린 느낌인데다 아주 어둡다. 어두운 수험생의 입장에서 공감하기 딱 좋은 농도의 감정이다. 내가 그랬다. 내가 배운 국어 선생님께 그 말을 많이 듣기도 했고. 어쨌든 밝은 작품은 많이 없다. 그러므로 수능 문학 위에 나의 상태를 얹을 필요도 없다.
오늘의 나는 집에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는 중이다. 막 영어 수업이 끝났다. 영어 수업 내내 나는 침전했다. 어제의 시어가 오늘까지 이어진 셈이다. 내일도 수업이 있다. 부디 내일은 나의 상태와 관련된 시어가 나오지 않길 바란다. 산문에서도 만나고 싶지 않다.
영어수업에서 나는 나이가 어린 편이다. 서른이 훨씬 넘은 분들도 계시고 반대로 나와 비슷한 나이대도 보인다. 여러 사람과 다양한 배경으로 다른 언어를 사용해 대화한다는 건 꽤 좋은 경험이다.
물론 수업이 끝나고 바로 지하철역으로 달려온 건 아니다. 중간에 세계과자점으로 샜다. 그리고 오랜만에 본 초등학교 친구와 대학로에 갔을 당시 샀던 프레첼을 다시 샀다. 천오백 원인데 양이 많다. 내 기준 삼 일은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마시멜로도 샀다. 불에 구워먹을 거다. 물론 또 태우겠지만. 우리집 가스는 조절이 잘 안 된다. 오래된 고철이라 그렇다. 마음에도 없는 문장을 양산해내는 썩은 공장. 썩은 공장은 나의 마음이고 나의 마음은 썩은 고철로 이루어졌다. 우리집 가스도 나와 같은 고철로 만들어진 것 같다. 둘 다 녹슬고 있다.
그리고 방금 두 명의 취객을 만났다. 모두 내가 직접적으로 상대한 건 아니었지만 역사 내에서 고성을 질러대기에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나도 저렇게 술이나 마시고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당분간은 그러지 않을 거다. 그리고 앞으로도. 물론 그 취객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의 지하철에는 이상하게 자리가 없다. 나는 사람 없는 지하철의 공허한 분위기를 좋아하는데 오늘의 지하철은 그렇지 않다. 원래는 앉아서 이북을 잃을 예정이었는데 다 무너졌다. The sight of you 라고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책이 있는데 나름 재밌다. 로맨스 장르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가끔 읽어보면 판타지 같아서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빨리 가서 책이나 읽으며 프레첼 까먹고 싶다. 다 태운 마시멜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