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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 Oct 04. 2022

글이 없는 곳은 육첩방, 남의 나라

언젠가부터 글을 쓰기 위한 사람이 되었지

글이 없는 곳은 꼭 육첩방, 남의 나라 같다. 글자와 책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AR5489라도 될 법한 요상한 행성 같다. 사실 저런 행성의 이름은 없지만, 그만큼 내게 있어 글은 소중하다는 의미이다.
나는 왜 자꾸만 글쓰기 모임을 찾아 헤매는 것일까? 이미 벌써 들어가 있는 글 모임도 한 개, 얼마 전에 구상해서 시작 단계까지 온 문학 메일링 서비스가 한 개, 그리고 글쓰기 연합동아리가 한 개, 마지막으로 얼마 전 들어온 글쓰기 모임이 한 개. 나는 수도 없이 글을 쓰고, 글을 쓰기 위해 살고, 언젠가부터 살기 위해 쓰던 글의 주객을 전도해버렸다. 무엇이든 좋았다. 소설도, 수필도, 시도 전부 좋았다. 그저 글만 있으면 적어도 내 우울이 나를 죽음으로 이끌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타자기를 닮은 요상한 기계식 키보드는 언제나 찰칵 소리를 내며 울렸다. 그래서 좋았다.
살기 위해 쓰던 글이, 언젠가부터 쓰기 위해 살게 되었다는 사실마저 좋았다.

나는 운동을 잃었다. 나는 운동을 하기 위해 살던 사람이었는데, 단순히 여자라는 이유로 나는 운동을 잃어버렸다. 어느 순간의 나는 미쳐있었다. 몸을 움직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자꾸만 목표를 수정했고, 수능 공부를 다시 하던 와중에도 체대를 가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운동이 하고 싶었다. 그건 고작 취미가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일이었다. 숨을 쉬고 땀을 흘리는 모든 과정이 나를 울게 만들고 웃게 만들었다. 그런 운동을 잃었다. 나는 그때 죽으려 했다.
언젠가부터 나의 글은 죽음만을 나타냈다. 아마도 운동을 잃은 심정을 글로 표현하려던 의도였을 것이다. 나는 실제로 그랬고, 그래서 내 글에는 우울과 죽음만이 가득했다. 소리 없는 키보드는 언제나 송장의 몸을 닦듯 스윽스윽 소리를 냈다. 그만큼 조용했다. 어느 순간은 영안실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것처럼 조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누군가가 살라고 했다. 아무런 목표 의식 없이, 어느 날 어느 순간에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내게 삶을 가르쳐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내게 살라고 했다. 살아서 글을 쓰고 작가가 되어 언젠가 책을 내달라고 했다. 내게 그랬다. 그 책을 자기가 편집할 수 있으면 좋을 거라고. 책이 나오면 꼭 밥을 사라고. 나는 그 말을 듣고 혼자 열심히 울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었다.
그 사람은 비가 오면 항상 우울해했다. 지금은 비가 온다. 그래서 내게 살라고 말했던 사람이 생각났다. 그래서 글을 써야 했다. 그래서 글을 쓰고, 밥을 먹고, 눈을 뜨고 살아야 했다.

글을 어떻게 쓰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글이 살아있으면 된다. 나는 그 마음으로 언제나 글을 써왔다.
나는 그중에서도 삶을 나타내는 수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다음에는 삶을 가로지르는 소설이 마음이 들었다. 바로 그다음에 삶의 서정을 나타내는 시가 마음에 들었다. 결국 나는 글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무슨 글이든 괜찮았다. 일단 살아있으면 희망은 있다는 말이 내게 살아갈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내게 살아가라고 말하던 그 사람도.
나는 언젠가 글을 쓰고 책을 내서, 그리고 살아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나야 한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목표다.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시끄러운 기계식 키보드가 방 안을 울린다. 그러면 이곳은 영안실에서 벗어나 왁자지껄한 놀이공원이 된다. 마음에 따라 변하는 공간은 글에 생명을 담는다. 나는 이 글에 활기를 담고 싶었다.
살아있으면, 살아있으면 희망은 있다. 나는 그 마음으로 요새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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