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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미켈란젤로 아닌 베드로 성인이어야 하는 이유.

- 가족과 떠난 유럽 배낭여행 -

by 슈크림빵 Mar 14. 2025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저녁 식사를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가족의 무사귀한과 더불어 스위스로 향하는 여성의 남은 여정에 축복을 빌었다. 그들이 떠나간 아침 식탁은 휑하기만 했고, 차려진 맛난 음식들 모두 내 차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즐겁지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시나브로 정들었나 보다. 사람으로 인한 허전함은 사람으로 채워야 하는 법, 해서 트레비 분수로 향하는데 굵은 장대비가 쏟아진다. 폭염이면 폭염, 폭우면 폭우,, 중간 없는 이탈리아의 화끈함에 혀를 내두른다. 쉬 그칠 것 같지 않아 출입문이 열려 있는 인근 맨션으로 들어갔는데 마주친 주민의 곱지 않은 시선이 느껴졌다. '잠시 비를 피하려는 것뿐, 털끝 하나 손대지 않을 테니 그 시선 좀 거둬줄래요?'


다시 찾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주요 관광지에 붙박이 하는 경찰이 아닐까. 물론 처음 접하는 광경은 아니었지만, 인원의 증편은 분명 달라진 점이었다. 정복차림으로 인해 어디서든 눈에 띄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레비 분수를 기준으로 제법 많은 노점상들이 영업 중이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인가? 아니면 모종의 딜을 맺은 것인가? 솟은 생각이 후자 쪽으로 기울자, 단속 아닌 되레 뒤를 봐주는 것이 진짜 목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고로 돈과 사람이 얽히면 구린내가 진동을 하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재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먹이사슬인 듯도 공생관계인 듯도 한 그들을 둘러보다 분수 뒤로 자리 잡은 폴리 대공의 저택이 눈에 들어왔고, 여기에 얽힌 사연이 생각났다. 그리고 바라다본 오빠의 시선 역시 나와 같은 듯해 장난기가 돋았다. 먹잇감을 포착했으니 공격개시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내 식구는 절대 안 돼. 시선 돌려."

 "너도 봤구나."

그러나 눈을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목을 반 자는 빼고 몰입을 하는 오빠에게 보란 듯이 손찌검을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가 한을 품으면 무서운 법, 모르나 본데 폴리 대공 저택엔 이미 한이 서려 있지. 저기 오른쪽 창문 말이야. 보통의 유리창 같아 보이지만 실은 그림이라는. 과거 저곳엔 미인이 살아, 남자들이 흠모하자 이를 차단하기 위해 눈속임을 한 거지. 오죽하면 그랬을까. 그러니 한밤 중 낯선 여인과 조우하지 않으려면 눈 돌리지.."

그제야 찰떡 같이 알아 들었는지, 슬며시 올라가 있던 오빠의 입꼬리는 제자리를 찾았다. 

 "계속 보고 있으니 좀 서글퍼진다. 저기 아랍계 남자 말이야. 좀 전까지 열쇠고리를 팔고 있었는데 비가 흩뿌리니 종목을 바꿔 우산을 팔잖아."

멋대로 뻗친 내 시선을 접고 오빠의 시선을 좇았더니, 열쇠고리와 마그네틱을 팔던 아랍계 상인은 어느새 우산장수로 변해 있었다. 그를 보고 있자니 꼬마 때 들은 '우산장수 소금장수'가 떠올랐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날이 맑으면 또 맑은 대로 늘 걱정뿐인 어머니를 보며 내가 내놓은 의견은 이와 같았다. '우산도 팔고 소금도 팔면 될 텐데.' 과거 기억을 소환하는 사이 흩뿌리던 비가 잦아들자, 그는 우산을 들었던 손에 열쇠고리를 쥐고 흔들어댔다. 막연했던 상상과 맞닥뜨린 현실 사이에는 괴리감이 있었다. 설령, 우산장수이며 소금장수였다 한들, 그는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삶의 무게가 그를 짓누르고 또 다른 걱정이 그의 어머니를 괴롭힐 테니 말이다. 시원스레 물줄기를 쏟아내는 분수와 활짝 미소 짓는 사람들로 인한 역동성 속에서 홀로 정적인 아랍계 상인은 틀린 그림이었다. 그 순간, 가끔 외곤 하는 주문을 그를 위해 읊었다. '이방인이여, 부디 삶의 무게를 이겨내기를..'


뽀뽈로 광장을 돌아 떼베레 강을 끼고 바티칸으로 향한다. 그간 비로 인해 불어난 강물의 움직임은 꽤나 역동적이었다. Côte d’Azur를 보고 오신 아빠는 구불텅 흐르는 흙탕물에 적잖이 실망하신 눈치였으나, 바티칸 시국을 곱씹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12제자의 이름을 속속들이 나열하지 못한다손 치더라도 단, 한 사람,, 베드로는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로마 그리고 바티칸 시국에 발을 들이는 자라면 단언컨대, 그래야만 한다. 물고기 대신 사람을 낚는 어부였음을, 12제자 중 첫 번째 제자였음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처음으로 하였음을, 천국의 열쇠를 가진 수문장임을, 가톨릭의 초대 교황이라 일컬어짐을 모른다손 치더라도,, '네 반석 위에 내 집을 지으리라'는 성경 말씀대로 그의 무덤 위로 성당이 축성되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바티칸 시국, 베드로 대성당이라니까."


반가운 한국어,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던 그의 말이었다. 이제 막 바티칸 투어를 끝마치고 나온 듯한 두 남자의 대화는 몸속 세포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이에 불편해진 마음은 두 눈 가득 곱지 않은 시선을 쏘아댔다. 기억을 되짚어 보면, 한나절은 족히 이어졌던 투어였다. 꽤 긴 시간 동안 성당 이름을 몇 번이나 들었을까? 설령 친구 따라 강남에 갔다 한들, 교보문고 간판은 물론 서가에 꽂힌 책 한 권은 떠들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청바지 뒷주머니에 아슬아슬하게 꽂혀 있는 지갑 하며, 한껏 치장한 차림새 하며,, 이것이 진정한 돈지랄이 아닐까!! 목적은 물론 대책도 없는 어린 동포로 인해 심히 불편했다. 형편없는 그를 돌아보며 다시금 나를 채찍질했다. '가고자 하는 방향이 먼저다. 나아감은 그다음이다.'

 

 “Quo vadis, Domine?”

 "Venio Romam iterum crucifigi"

기독교 박해가 한창일 때, 로마를 떠난 베드로는 아피아 가도에서 예수님을 만난다. 행선지를 묻는 제 물음에

'십자가에 못 박히러 로마로 간다.'라 답한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의 부끄러움에 통곡한 베드로는 곧장 로마로 돌아가 머리를 아래로 두고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다 한다. 그가 순교한 장소를 두고 갑론을박이 한창일 당시, 혹자는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San Pietro in Montorio)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바티카누스 언덕 위 Via Cornelia로 통하는 인근 길에 묻혔다는 당시의 기록은, '네로의 원형 경기장'었다는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왜냐하면 Via Cornelia는 네로의 원형 경기장 북쪽 벽을 따라 동서로 뻗어 있었던 고대 로마 도로로 지금은 성 베드로 대성당 남쪽 벽으로 덮여 있는 땅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곳은 이교도와 그리스도인의 공동묘지였고, 베드로의 무덤은 기념비 없이 단지 그의 이름을 상징하는 피로 물든 돌뿐이었지만 기독교 박해가 한창이던 당시였기에 비(非)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교황청의 입장은 달랐다. 베드로의 순교는 서기 65년 전후로 추정되며, 서기 90년 아나클레토 교황을 시작으로, 서기 4세기 경엔 콘스탄티누스의 명에 의해 옛 성 베드로 성당이 건설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교황청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물을 만들고자 심혈을 기울였고, 이에 브라만테, 줄리아노 다 상갈로,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카를로 마데르노, 베르니니, 보로미니에 이르는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대표하는 수많은 거장들의 손을 거쳤다. 수세기에 걸친 교황청의 노력과 건축과 미술을 넘나드는 거장들의 열정이 녹아들어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된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우리가 종종 범하는 실수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발다키노, 베르니니에 의해 완성된 광장과 회랑 위 140개의 성인 석상, 사도 궁, 바티칸 박물관을 포함한 다수의 현상에만 치우쳐, 자칫 성당 축성의 의미를 등한시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 본질을 간과해서도 망각해서도 안 된다.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로 들어가니 발다키노가 시선을 잡아챘다. 1625년 교황 우르바노 8세(재위 1623-1644)가 지시하고, 1633년 6월 29일 베드로 성인의 축일에 맞춰 베르니니가 완성한,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중앙 제대 뒤쪽 부분에는 베드로의 의자(Cathedra Petri)가 있는데, 여기에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베드로가 로마에서 선교 활동을 할 당시 앉았던 나무 의자 조각을 모아서 5세기경, 상아로 장식된 의자를 만들었고, 후에 교황 알렉산데르 7세(재위 1655-1667)의 명에 따라 베르니니는 그 의자 위에 약 75,000kg에 달하는 청동을 입혀 장식했다 전해진다. 베드로의 의자가 중앙 제대 뒤쪽에 위치한 이유는, 교황이 베드로의 계승자임을 강조하는 의미라 한다. 또한, 콘클라베를 통해 선출된 역대 교황들이 교황명을 선택할 때, 베드로를 택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관례라 하는데, 이는 금기사항은 아니나 예수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일뿐더러, 초대 교황이라는 상징성 때문이라는 후문이 전해진다. 이처럼 기독교 역사상 베드로 성인은 존귀함 그 자체라 하겠다. 베드로 성인을 포함한 역대 교황들의 무덤이 있는 지하 예배당은 출입이 불가능한 상태라, 돌아서던 걸음에 바닥의 뚫린 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닿으려는 찰나, 지하 묘소를 밝히는 불빛의 출처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마저도 경건하게 느껴져 차마 밟고 지나갈 용기는 없었다. 비록 선데이 신자였지만 그 빛을 바라보며 잠시 마음을 차분히 한 후에 걸음을 옮겼다. 


이른 아침에 만나 어슴푸레한 저녁빛을 마주하고야 바티칸 투어는 끝이 났지만, 이는 정작 바티칸의 극히 일부만 본 것일 뿐, 작정하고 보려 한다면 몇 날 며칠로도 부족하다고 가이드는 말했었다. 바티칸 미술관, 성 베드로 대성당, 사도 궁, 시스티나 성당, 바티칸 정원, 스위스 용병, Passetto di Borgo 등은 가이드의 말을 정확히 뒷받침했다. 대성당의 쿠폴라에서 올라 광장 끝까지 따라가면 정확히 열쇠 모양이었다. 바티칸 투어를 하지 않겠다는 아빠의 오빠의 뜻을 받아들여, 광장 정중앙에 앉아 대성당과 사도 궁, 그리고 회랑 위 성인 석상을 휘돌아 보는 것을 끝으로 바티칸 시국을 등졌다.


 만약 가이드의 설명이 없었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아테네 학당>을 바라보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소크라테스를 찾은 후에 돌아섰겠지. 그러나 내 두 눈으로 라파엘로를 보았지. 타고난 이야기꾼인 그가 전하는 교황 율리우스 2세와의 팽팽한 기싸움은 물론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가 완성되기까지의 미켈란젤로의 열정과 수고뿐 아니라 그 외 여타의 그림과 조각 그리고 바티칸의 역사적 지식,, 이 모두를 습득할 기회인데. 여기서 끝이 아니라 잠시 갖는 쉬는 시간엔 그가 건네는 고국의 먹거리에 보태어 자그마치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아이스크림을 맛보며 투어는 마무리되는데.. 딛고 있는 땅은 분명 로마였지만 바티칸 광장이 등 뒤에 남아서였을까? 언제 또 오겠냐는 기약 없는 약속은 바티칸 투어에 대한 아쉬움을 솟구치게 하여, 다시금 물어보았지만 오빠는 단호했다.


 "천장화 올려보다 목 부러지는 줄 알았다며, 창세기의 아홉 가지임을 예습하고 보았음에도 갸우뚱했다면서, 나는 그냥 책으로, 인터넷으로 만족하련다."


빛과 어둠의 분리, 해와 달의 창조, 물과 흙의 분리, 아담의 창조, 이브의 창조, 유혹받은 아담과 이브 &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노아의 번제, 대홍수, 술에 취한 노아,, 창세기의 내용을 미리 외웠음에도 불구하고 마주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는 꽤나 어려웠다. 한껏 젖힌 목으로 인한 신체적 압박과 'NO PICTURE, SILENCE'를 기계처럼 외치는 관리인으로 인한 심적 제약 때문이었는지, 창세기의 내용을 이해함은 고사하고 아홉 가지의 경계선을 찾는데도 난항을 격어 결국, 다시금 책을 떠들어 보는 수고를 했더랬지. 물론, 삶에 있어 바티칸 투어 전과 후의 변화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아쉬웠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싫다는데 도리가 있나.


성 베드로 광장 베르니니가 제작한 열주 뒤로 사도 궁과 맞붙어 있는 'Porta San Pellegrino' 게이트는 성벽에서 가장 오래된 문 중 하나로, 광장이 완성되기 전까지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의 유일한 출입구였으나, 광장 건설과 함께 1563년 폐쇄된 후, 현재는 스위스 근위대 경비병의 막사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천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이곳엔 실로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는데, 그것은 과거 passetto di borgo의 시작점이었다는 것. 성 베드로 대성당과 산탄젤로 성을 연결하는 약 800m의 '작은 통로'라는 뜻의 passetto di borgo는 적의 침입에 대비했고, 때론 죄수를 이송하는 통로였으며, 위급시엔 교황의 피난처의 역할을 했다. Largo del colonnato - Via dei Corridori - Borgo S. Angelo 거리까지 이어지며, 피아 광장 (Piazza Pia)을 건너 작은 숲을 거쳐 산탄젤로 성의 정면이 아닌 위쪽의 마르코 요새 왼쪽 뒷부분으로 이어진다. 


800년, 프랑스의 샤를 마뉴 대제의 서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그는 이교도의 칩입으로부터 대성당을 지키고자 새로운 성벽 건설 사업을 명했고,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3세(재위 795-816)는 성 베드로 대성당과 산탄젤로 성을 연결하는 성벽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16년 후 그가 선종하자 성벽도 사라져 버렸는데, 이는 새 성벽의 건설로 인한 교황청 권위의 상승효과를 염려한, 로마인들에 의해서였다. 성벽의 철거는 곧 이교도 침략의 발판으로 작용했다. 바티칸 역사에서 846년은 치욕의 해로 기록되고 있는데, 성 베드로 대성당을 약탈한 그들은 정확히 사흘 만에 돌아갔고, 베드로 사도의 묘가 파손되지 않은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았다 한다. 그에 반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으로 둘러싸인 로마 시내는 아무런 피해도 없자 로타리우스 1세는 교황 레오 4세(재위 847-855)에게 다시금 성벽 건설을 명한다. 이로써, 테베레 강변의 산탄젤로 성에서 시작해 바티칸 언덕 주위를 돌아 다시 테베레 강변에서 끝이 나는 총길이 3km, 44개의 감시탑이 세워진 성벽이 완성되었는데, 이는 바티칸 지역의 시작점이자 지형도였고, passetto가 만들어지기 전인 850년 경의 상황이었다. 

9세기 중반, 바티칸 지역은 도시 밖에 있었고, 당시 교황청은 라테라노 대성전에 있었다. 성 베드로 광장 오른쪽 열주 회랑 뒤편으로 있는 성문을 중심으로, 안쪽은 바티칸 시국의 땅이고 성문 밖은 이탈리아의 영토였다. 성문 위로는 긴 성벽이, 아래로는 좁은 도로가 있는데, 고대 로마 시대에는 성곽 주변을 외곽지역이란 뜻의 'borgo'라 불렀다. 방어와 대피를 목적으로 한 passetto 건설에 매진한 이는 교황 니콜라오 3세(재위 1277-1280)였다. 이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재위 1492-1503)에 의해 성벽은 더욱 견고해졌고, 이때부터 죄수들을 산탄젤로 성의 감옥으로 이송하는 일과 더불어 교황들의 피난처 역할도 병행하게 된다. 

passatto를 통해 교황이 산탄젤로 성으로 달아나는 사건은 두 차례 기록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알렉산데르 6세였다. 교황에 오른 그는 제 가족 챙기기에 매진하였고 그들에게 온갖 특혜를 제공함으로 로마인들 뿐만 아니라 성직자들까지 등을 돌리게 한다. 그의 권력 남용에 폭발한 나폴리 왕국의 국왕 페르디난도 1세(재위 1458-1494)는 결국 피렌체, 밀라노 베니스를 끌어들여 교황에게 반기를 들었고, 이에 그는 나폴리 왕국을 넘긴다는 조건으로 프랑스의 샤를 8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를 수락한 샤를 8세가 파견한 프랑스 군의 규모가 자신의 예상보다 많자, 나폴리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을 넘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성급한 판단 끝에, 프랑스 군에 맞서 싸우라고 나폴리 왕국에 지시를 내린다. 교황이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샤를 8세는 크게 진노하여 피렌체를 점령한 프랑스 군에게 곧바로 로마 진격을 명한다. 이에 다급해진 교황은 여러 도시뿐 아니라 오스만튀르크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하니 급박했던 당시의 상황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그러나 교황의 사정은 관심밖의 일이라는 듯, 샤를 8세의 군대가 로마로 입성하여 도시를 불태운 것도 모자라 성 베드로 대성당 인근까지 진격해 오자, 자신의 안위기 걱정이 된 교황은 passatto를 통해 산탄젤로 성으로 줄행랑을 친다. 

두 번째는, 가장 끔찍한 로마 약탈을 초래한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였다. 1527년 당시 유럽에서는 프랑수와 1세와 카를 5세가 가장 큰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백년전쟁 이후 프랑스는 왕권 강화와 더불어 국정이 안정되었고, 거기에 인구마저 증가하자 유럽의 강대국으로 자리 잡게 된다. 즉위와 동시에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를 차지하였으며, 나아가 북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지역에 대한 영향력뿐 아니라, 교황 레오 10세와 볼로냐협약을 체결하며 성직자들에 대한 왕권의 통제력까지 강화해 나간다. 

반면, 카를 5세는 아버지 필립 1세의 사망 후 어머니와 더불어 에스파냐 공동 왕위에 즉위하고, 뇌물로 포섭한 선제후들에 의해 15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된다. 양쪽 조부모로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와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 남부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 남아메리카 식민지를 물려받았으니, 프랑스 입장에서 보면 북쪽의 잉글랜드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럽 전역이 카를 5세의 소유였기에, 이는 프랑수아 1세에겐 전쟁의 필연성으로 작용했다. 

당시 유럽 각국들은 이탈리아 반도를 차지하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나, 정작 이탈리아 반도는 십여 개의 작은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어 그들의 침략에 대응하기는커녕 스스로가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프랑수와 1세와 카를 5세의 패권 다툼이 한창일 당시, 그 중간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끼어 있었다. 그러던 중, 파비아 전투(1521-1526)에서 프랑스가 제국군에게 대패한 것도 모자라 국왕 프랑수와 1세가 포로로 잡히자 클레멘스 7세는 충격을 받고, 이에 카를 5세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군사 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과거 카를 5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에 반대했던 교황 클레멘스 7세, 1521년 밀라노를 탈환하고 통치권마저 제한을 가한 스페인군에게 반감을 품은 프란체스코 2세, 파비아 전투에서 대패한 프랑스가 주축이 되고,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가 참여한 일명,, 코냑동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동맹군이 롬바르디아의 로디 등 북쪽의 이탈리아를 야금야금 점령해 나가자 이에 가만있을 카를 5세가 아니었다. 특히 그는 통치권을 부여한 밀라노의 공작 프란체스코 2세의 배신에 극도로 분노하여 제국군으로 하여금 밀라노를 탈환하고, 스포르차 가문의 통치권마저 회수해 버리자 견고했던 코냑동맹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파비아 전투의 참상을 떠올린 프랑스는 소극적인 태도로 돌아섰고, 자국의 사정을 핑계 삼아 베네치아는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도시 국가들 역시 제국군과의 정면충돌 대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이는 제국군에게 있어 날개를 달아준 격, 스페인 주둔군과 독일 용병으로 구성된 브루봉 공작이 이끄는 34,000의 제국군은 로마로 진격한다. 가톨릭교도인 카를 5세의 군대가 감히 로마 것도 교황청을 침공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안일한 생각을 비웃듯, 제국군은 잔니콜로와 바티칸 언덕 쪽의 성벽을 공격한다. 턱밑까지 추격해 온 제국군 소식에 클레멘스 7세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만, 당시 로마를 지키는 병력은 오천명의 군인과 스위스 근위대뿐이었다. 도시를 감싼 성벽은 단단했지만, 제국군에 맞서기에 그 수는 적었고, 그보다 심각한 것은 제국군의 포병 부대는 용맹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러던 중, 성벽이 함락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부르봉 공작이 총에 맞아 전사하자, 경고했던 질서는 무너진다. 북부 이탈리아를 점령할 당시 제대로 급여를 받지 못한 탓에, 전리품을 챙기고자 눈에 불을 켠 제국군을 통제할 방법은 없었다. 맞서 싸우던 교황청의 군인들은 그들의 맹렬한 기세에 겁을 먹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돌진하는, 후퇴하는 그들로 인해 아수라장이었으나, 스위스 근위대는 달랐다.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500명 중 189명이, 교황이 대성당으로 피신하는 과정에서 단 42명만이 살아남았다. 충성 서약을 맹세한 그들은 끝까지 교황을 위해 싸웠고, 덕분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피신한 후, passetto를 통해 산탄젤로 성으로 무사히 대피하게 된다. 

애당초, 이교도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함이 목적이었으나, 기록에 따르면 이교도가 아닌 같은 기독교인의 침입이라는 점에서 다소 아이러니했지만, 결국 인간의 욕심이 불러온 결과를 보며 꽤 찜찜하면서도 그럼에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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