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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다 Jan 24. 2023

한 달 만에, 아이는 변화했다.

말 느린 아이 키우기

센터에 다녀온 지 한 달이 지났다. 변화가 느껴졌다.


아빠가 편의점에 다녀온다고 하면서 장난으로 말했다 “있음아. 아빠랑 같이 갈래?”

“응”


내 귀를 의심했다. 엄마와 언니를 놔두고서 둘만 나가겠단다. 아빠에게 안겨 순순히 따라가는 모습에 분명히 변화가 느껴졌다.


엄마에 대한 애착이 안정되니 주변 사람으로 그 애정이 확장이 되는 모습이었다. 센터 다녀온 지 얼마나 됐더라? 달력을 찾아 기억을 더듬어본다. 한 달여 만의 일이었다. 엄밀히 생각하면 한 주 두 주 지나면서도 조금씩 안심을 해서 엄마가 화장실에 가도 아빠, 언니와 밥을 잘 먹거나 언니와 둘이 놀기도 하는 모습이 있었다. 이렇게 빨리 변화가 나타나다니 정말 뭔가를 놓치고 있었고. 그것을 찾아줬다는 기쁨이 서서히 찾아왔다.




두 달여가 지났다. 이제 다른 변화도 보인다. 새로운 곳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이동이 잦다. 일단 매일 어딘가를 나간다. 하다못해 밥을 먹기 위해서라도. 코로나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줄어든 핫 플레이스들을 여유 있게 즐겼다던 사람들이 우리다. 그다음으로 이삼주에 한 번씩은 집을 옮겨 다녔다. 도시집과 산골집을. 집을 옮겨 다니면서 주변에 있는 놀이터와 공동육아나눔터에 거의 매일 데리고 다녔었다. 더 나아가 주말이면 답답하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쌓게 해 준다는 명분으로 무조건 밖에 나갔다.


있음이가 ‘문을 열고 공간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에 거부가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공동육아나눔터 문을 보면 안 들어가려고 했다. 그 공동육아나눔터 마저 집 근처의 3곳을 돌아가며 방문했었다.


막상 들어가면 잘 놀지만 문 앞에서는 망설이고 두려워했다. 그 안에 계신 직원분들, 할머니께서 말을 걸면 와 ‘모두 나만 쳐다봐’하며 좋아한 적도 있지만 쑥스러워하거나 피하기도 했다. 문 앞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시간을 좀 주고 기다리면 들어갔던 적도 있었다. 문 앞에서 거부를 해서 아예 못 데리고 들어가고 발길을 돌린 적도 있었다.


그 정점은 센터에 처음 갔었을 때다. 아이는 상담선생님이 방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는 밖에 나가겠다고 어마어마하게 울었으니 말이다.



낯선 환경에 자주 노출 되는 것보다 한 곳에 계속 데리고 가야겠다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 후로는 아침을 먹고 집에서 놀다가 지겨워질 무렵인 오전 11시쯤 유모차에 태워 매일 똑같은 놀이터에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노는 아이가 한 명만 있어도 의식하며 주변을 뚫어지게 살피고 그 아이들이 놀이터를 점유하지 않을 때 만 움직였다. 점차 공간 자체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여긴 내 공간이라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잘 아는 공간에 가면 어른들도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는 계단이 있고 올라가면 흔들 다리가 있고 또 미끄러져 내려오면 되는 공간. 시설물 하나하나를 자유로이 탐색하며 놀다가 그것을 모두 파악해 버린 뒤엔 주변에 한 두 명이 와도 아이들을 의식하긴 하지만 즐기기도 했다.


언젠가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들 20명 정도가 단체로 놀러 온 적이 있었다. 그 아이들과도 서너 번 더 만났다. 같은 공간을 사용한 거다. 처음에는 내 손을 꼭 붙잡거나 흔들 다리 앞에 앉아만 있던 아이가 그 언니 오빠들에게도 관심을 보이고 아이들이 어린이집으로 돌아갈 때 같이 가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방법이 맞다 싶어서 8월경부터 추워지기 직전인 12월 경까지 매일 가는 놀이터를 중심으로 놀이터 한 곳만을 더 추가하고 늘리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아이가 세상에 대한 경계를 조금씩 푸는 것이 느껴졌다.


종종 가는 공동육아나눔터가 있다. 최근에 방문해 보면 내가 아는 그 아이가 이렇게 성장한 게 맞나 싶을 정도다. 아이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꺅꺅 소리를 내며 좋아하고 문 앞에서 버티며 운 날도 있던 그 문인데도 빠르게 찾아들어간다.




돌 지날 즈음까지 언니 등하원을 내가 하고 있음이를 외할머니께 맡기고 갔었다. 등원하고 돌아오면 40분이 걸렸다. 하원까지 매일 80분. 매일매일이 아이에겐 불안 그 자체였던 게 아닐까.


엄마와 매일 아침 떨어져야 했던 아이는 보통 괜찮았지만 엄마로부터 떨어져 할머니손에 이끌려 옮겨질 때 서럽게 울 때도 있었다. 그래도 괜찮을 줄 알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할머니 품이니까.


동생이 막 생긴 첫째는 폐위된 왕과 똑같다니 그를 위한다고, 내가 첫째를 등하원 한 게 잘못이었나 싶다. 둘을 어떻게서든지 같이 데리고 다녔어야 했나 자책한다. 백일도 안된 아이를 위해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었는데. 나도 덜 힘들고 아이들도 안정되게 키우고 친정엄마도 기꺼이 함께해 주셨던 그 상황이. 아이 둘을 위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선택이 돌이켜보니 내 몸이 편하고 첫째를 가까스로 지켜냈을지 몰라도 있음이에겐 불안감을 줬다.


다행인 건 일 년간 함께한 할머니의 음성, 체온, 감촉을 있음이가 몸으로 다 기억하는지 외할머니를 각별히 챙긴다는 거다. 그나마 따뜻한 사람의 품을 한자리 더 만들어줘 다행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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